흥국생명 이재영이 1일 서울 양재동 더케이호텔에서 열린 도드람 2018~2019 V리그 시상식 전 스포츠경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석우 기자
“나는 운을 신봉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내가 더 노력할 수록 나에겐 더 많은 운이 따르게 된다는 것도 안다.”(토머스 제퍼슨)
‘이재영(23·흥국생명)의 시즌’은 이 격언 한 마디에서 시작됐다. 도드람 2018~2019 V리그 여자부 정규시즌 최우수선수(MVP) 이재영은 시즌 개막을 앞둘 즈음 ‘인생 글귀’를 만났다고 했다. 지난 1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더케이호텔에서 시상식을 앞두고 만난 이재영은 “‘인생 글귀’였다. 그 글귀를 알게 된 뒤 더 많이 연습하고 노력해서 ‘더 많은 운’을 내 것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했다”고 했다.
2018~2019시즌 이재영의 노력은 ‘운’ 이상의 결실을 제대로 맺었다. 전 시즌 최하위에 그쳤던 흥국생명은 이재영의 눈부신 활약과 함께 12년만에 정규시즌·챔피언결정전을 통합우승했다. 이재영도 정규시즌과 챔프전 MVP에 만장일치로 선정됐다. 지난 1월 올스타전 MVP를 포함해 2010~2011시즌 황연주(현대건설) 이후 8년만에 정규시즌·챔프전·올스타전 MVP를 동시석권한 여자 선수가 됐다.
■힘들었지만, 열정으로 버틴 시즌
이재영은 “2016~2017시즌 팀이 정규시즌 우승을 한 번 하긴 했지만 통합우승은 느낌이 또 다르더라”며 “시즌을 준비하면서 힘들었던 부분들이 다 보상을 받은 느낌도 들어 그날 밤 잠을 제대로 못이뤘다”고 했다. 가장 빛나는 시즌을 치렀지만 그만큼 몸은 힘들었다. 챔프전 우승을 확정한 뒤 잠시 심한 감기를 앓았다고 했다. 팀의 주포로서 이재영의 공격점유율(33.81%)은 외인 선수 베레니카 톰시아(31.99%)보다도 높았다. 고질적으로 안고 있는 왼무릎 부상이 도져 무릎에 물이 찬 채로 챔프전을 치러야 했다.
하지만 이재영은 배구에 대한 열정으로 버텨냈다. 이재영은 “막상 시즌을 치르면서 ‘생각보다는 힘들지 않다’고 느꼈다. 돌이켜보니 비시즌 때 많은 일정을 소화하면서 자연스레 체력이 단련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재영은 시즌 전 아시안게임과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을 치르며 아르헨티나를 다녀오기까지 했다. 힘든 일정이었지만 “그래도 외국 팀과 직접 경기를 하면 배구를 보는 시야도 넓어지고, 조금 더 성숙해지는 걸 느끼게 된다”며 웃어 넘겼다.
배구에 대한 열정은 이재영이 시즌 중 맞이하는 정신적인 충격에도 단단하게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이재영은 정규시즌 막바지 자신의 소셜미디어로 전달된 악성 메시지를 공개했고, 구단이 이에 대한 법적 대응을 천명하기도 했다. 이재영은 “저에 대한 욕은 참을 수 있다. 하지만 가족들을 욕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시즌을 치르다보면 소셜미디어로 여러 심한 욕이 담긴 메시지를 받는다”며 “이것도 내가 좋아하는 배구를 하고 있기에 벌어지는 일이라 생각한다. 사사로운 비방에 흔들리면 나만 손해라는 생각에 그냥 견뎌낸다”고 했다.
흥국생명 이재영이 1일 서울 양재동 더케이호텔에서 열린 도드람 2018~2019 V리그 시상식에서 MVP상을 수상하고 소감을 얘기하고 있다. 이석우 기자
■나를 더 강하게 만든 감독님, 코치님, 선수들
이재영은 사실 2016~2017시즌 정규시즌 MVP를 받은 뒤 배구에 열정이 식었노라고 고백했다. 그 때 열정에 다시 불을 지핀건 팀 코칭스태프들이었다. 이재영은 “박미희 감독님은 지난 시즌 도중 저를 따로 불러 ‘네가 이뤄놓은 것들보다 앞으로 운동할 시간이 더 많이 남아있다. 남들만큼 연습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씀해주셨다”며 “그 때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말했다. 올 시즌을 앞두고 팀에 새로 합류한 김기중 수석코치는 ‘남자 선수들처럼 더 강하게 공을 때리고, 점프를 이용하고, 상대 수비 위치를 보면서 때리라’고 기술적인 성장에 도움을 줬다.
팀원들도 지금의 이재영을 있게 해 준 은인들이다. 팀의 해결사 역할을 맡아 우승을 이끈 이재영은 “올해 좋은 모습 보일 수 있던 건 그만큼 좋은 선수들이 잘 영입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시즌 전 자유계약선수(FA)로 영입된 센터 김세영과 레프트 김미연, 외인 톰시아도 시즌 내내 이재영과 함께 자리를 지켰다.
실력을 바탕에 두고 선수들 간 활발히 소통하며 흥국생명과 이재영은 강해졌다. 이재영은 “경기 도중에도 언니들이 어린 선수들에게 ‘이렇게 플레이하면 좋을 것 같다’는 대화를 바로바로 나눈다”고 말했다. 어느덧 팀에서 중간급에 위치한 이재영도 후배들에게 도움을 아끼지 않으려고 한다. 이재영은 “내가 주전으로 뛰면서 더 많이 득점을 내 점수차가 벌리면 어린 친구들이 코트에 설 기회가 많아진다는 걸 항상 염두에 둔다”고 했다.
■대표팀에서 ‘빠지면 안되는 선수’ 소속팀엔 ‘다시 한번 통합우승’
‘고등학생 국가대표’ ‘쌍둥이 국가대표’로 신인 때부터 주목받던 이재영은 어느덧 한국 여자배구를 대표하는 선수로 성장했다. 쌍둥이 동생 이다영(현대건설)이 시즌 초반 부진했던 팀 성적 때문에 마음 고생이 심했던 것과 대조되기도 했다. 그러나 둘 사이는 여전히 각별하다. 흥국생명이 최하위로 처졌던 2017~2018시즌에는 현대건설이 플레이오프를 치렀고, 그 때는 이번 시즌과 달리 이다영이 이재영에게 많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번 시즌 챔프전이 끝난 뒤 이다영은 이재영에게 “축하한다. 나는 네가 자랑스럽다. 네가 멋있는 것 같다”는 격려의 말을 건넸다고 한다. 이재영은 “(이)다영이와 나는 서로 다른 구석이 많다. 저보다 더 여성스러운 면이 많다”면서 “힘들 때 ‘신경쓰지 말고 즐기라’면서 서로 격려해주기에 더욱 힘이 됐다”고 했다. 언젠가는 챔프전에서 네트를 사이에 두고 멋진 대결을 펼치는 꿈도 꾸고 있다.
대표팀에서 이다영의 토스를 받아 멋진 공격을 펼치는 순간도 다시 꿈꾼다. 이재영은 “사실 다른 공격수들보다 키가 작다보니, 대표팀에서 한계를 느껴 고민한 적도 있다”며 “그래도 대표팀에서 ‘빠지면 안되는 선수’로 자리잡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MVP 수상 후 ‘해외 진출’에 대한 꿈을 언급하기도 했던 이재영은 “처음 통합우승을 해보니 좋더라. 일단은 팀에게 다시 한 번 통합우승을 안기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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