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수가 끝나 베어진 벼에서도 파란 싹이 돋는다. 그 위 받침대에 여러 모양으로 깨진 기와의 조각이 놓여 있다. 벼가 줄지어 선 3.6m×4.8m의 대형 스테인리스 거울에는 덕수궁에서 고위 관료와 외교 사절을 접대하던 덕홍전 천장의 화려한 문양이 비친다.
서울 중구 덕수궁의 함녕전과 덕홍전에서 4일 개막한 2025 예담고 프로젝트전 ‘땅의 조각, 피어나다’는 예담고에 수장 중이던 비귀속 유물이 전통예술부터 미디어아트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 작가들과 덕수궁에서 어우러진 특별한 전시다.
예담고는 발견·발굴된 유물 중 국가 귀속유산으로 선정되지 않은 유물을 모은 수장고다. 보통 발굴조사 후 선별회의를 거쳐 선정되는 국가 귀속유산은 국공립 박물관에 보관·전시되며, 그렇지 않은 비(非)귀속유산은 다른 조사기관에 보관·관리되고 있었다. 비귀속예산이 늘어나며 체계적인 별도 보관시설을 만들 필요성이 커졌고, 국가유산청은 2022년 예담고 사업을 시작했다. 쓰이지 않던 터널 등이 대전과 전북 전주, 전남 목포, 경남 함안까지 전국 4곳에 예담고로 재탄생했다. 유물 보관, 연구와 학생 대상 체험·교육이 열리고 있다. 2028년까지 경기 시흥과 강원 영월에 2곳이 추가로 문을 열 예정이다.
예담고의 유물은 국가 귀속유산에 비해 희소성이 떨어지거나 파손 정도가 심해 전시장의 주인공이 되기 어려웠다. 이번 전시는 이런 예담고 유물이 여러 작가들의 손을 거쳐 작품으로 재탄생한 자리다. 전국 예담고 4곳에서 이번 전시에 활용된 유물은 총 162점이다.
덕홍전에 함께한 기와와 벼, 영상의 조합은 플로리스트 레오킴과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소속 사진작가 김유정이 함께 한 ‘시간의 겹에서 바라보다’이다. 추수 기간 짧게 베어진 누런 볏단 사이에 푸르게 돋아난 새 줄기는, 끝난 것 같은 상황에서 새 생명을 잉태하고, 현재가 미래에 역사로 포섭되는 자연의 섭리를 나타낸다. 이는 수백년, 또는 수천년을 잠들어있다가 발굴을 통해 빛을 보는 유물과도 닮았다.
깨진 그릇이나 기와는 다시 발굴된 뒤엔 예전과 같은 용도로 쓰이지는 못하지만, 옛사람들의 생활을 알게 해 주는 역사적 사료로 다른 생명을 얻는다. 벼가 중심이 된 레오킴의 설치 뒤 스크린에는 김유정이 찍고 음영을 더한 기와 조각 사진들이 지나며 과거의 유물과 현재의 관람객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궁중 연회·의례에 쓰이는 인공 꽃인 국가무형유산 궁중채화 기술 보유자 최성우는 비단으로 만든 붉은 연꽃 사이로 영남지역에서 발굴된 토기 조각을 두었다. 그의 작품 ‘발굴의 순간’은 오래 묻힌 토기 조각이 발굴되는 순간을 연꽃과 연잎이 축하하는 듯하다. 재활용 소재를 활용하는 섬유공예가 김은하는 바닷속에서 발굴된 청자 조각을 바닥에 깔고 섬유로 만든 흰 연꽃을 함께 설치해 ‘숨을 틔우는 순간’을 완성했다. 연꽃이 떠 있을 푸른 수면을 깨진 청자 조각들이 표현하고 있다.
3차원(3D) 프린팅 공예를 선보이는 작가 서숲은 영남권에서 발굴된 토기 조각에 생분해성 플라스틱을 붙여 ‘조각, 새로운 형상을 잇다’를 선보였다. 깨진 토기는 불규칙한 과일 그릇이나 쟁반 등으로 다시 태어났다. 한국전통문화대 출신 회화 작가인 최지원과 김호준은 깨진 유물에 석고를 덧댄 뒤 새로 그림을 그려 ‘비워진 자리, 이어지는 이야기’를 완성했다.

전시에서 재해석된 유물들은 전시가 끝나면 원상복구돼 예담고로 돌아간다. 전시장인 덕수궁 함녕전 한켠에는 예담고의 유물을 만져볼 수 있는 체험 공간도 마련된다. 전시는 오는 16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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