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무실’ 신고센터

스포츠계는 선수들이 당한 성폭력 사건을 신고하고 처리할 수 있는 자체 시스템들을 만들어왔지만 시스템에 존재하는 한계로 인해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사진은 ‘스포츠 인권을 고양하고 스포츠 폭력은 근절하겠다’는 표어가 적힌 대한체육회 스포츠 인권센터 홈페이지 화면.

스포츠계는 선수들이 당한 성폭력 사건을 신고하고 처리할 수 있는 자체 시스템들을 만들어왔지만 시스템에 존재하는 한계로 인해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사진은 ‘스포츠 인권을 고양하고 스포츠 폭력은 근절하겠다’는 표어가 적힌 대한체육회 스포츠 인권센터 홈페이지 화면.

스포츠계는 지금까지 성폭력 관련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전수조사’ ‘일벌백계’ 같은 구호를 내걸며 자체적으로 선수들의 성폭력 피해를 막기 위한 장치를 마련하겠다고 밝혀왔다. 그러나 최근 성폭력 피해 사실을 폭로한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22)와 전 유도선수 신유용(24)의 사례를 보면 스포츠계 자체 시스템의 역할은 찾아보기 어렵다. 

둘은 오랜 시간 자신이 당한 폭력을 밝히지 못하다 최근 경찰에 코치를 가해자로 고소했다. 피해 사실을 쉽사리 털어놓지 못한 채 수년이 지났다. 피해 사실이 알려질 때 개인으로서 느낄 수치심도 두려웠지만, 지도자의 악행을 폭로하면 대표팀에 뽑히지 못하는 등 불이익을 당하고 선수생명을 이어갈 수 없을지 모른다는 걱정도 컸기 때문이다. 

대한체육회는 2009년부터 스포츠인권센터를 운영해 선수들의 신고를 받았다. 하지만 선수들이 스포츠인권센터를 ‘신뢰할 만한 기관’으로 여겼을지는 의문이다. 인권센터에 신고가 접수되면, 직접 진상조사를 하지 못하고 대개 각 종목 단체에 진상을 파악하도록 한다. 인권센터의 현재 인력과 예산 그리고 권한으로는 전체 종목 선수들의 성폭력 피해를 조사하기 어려운 탓이다.

그러나 각 종목 단체가 직접 상황 파악에 나설 때도 문제가 발생한다. 진상조사 과정에서 신고한 피해자가 누군지 가해자가 알게 되기 때문이다. 저변이 넓지 않고 선수와 지도자, 단체 임원들까지 사제관계 및 인맥으로 얽혀 있는 구조 탓에 다른 동료나 지도자들에게도 신고자의 피해 사실에 대한 소문이 퍼지게 될 염려가 있다. 한 경기단체 관계자는 “선수들이 성폭력을 신고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익명성 보호를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신고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대한체육회 스포츠인권센터 
신고 받아도 직접 조사 안 해
대부분 각 종목단체로 이관 
피해자 익명성 보호 어려워
“외부 제3기관이 담당해야”
 

각 종목 단체가 성폭력 예방·진상조사를 할 여력이 없기도 하지만, 대응도 적극적이지 않다. 심석희와 신유용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대한빙상경기연맹은 심석희의 폭행 피해 사실이 알려진 지 1년 가까이 지나서야 가해자 조재범 전 코치에게 영구제명 처분을 내렸다. 대한유도회 또한 신유용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관련 내용을 올린 지난해 11월 사건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으나 지난 14일 보도로 사건이 공론화되자 오는 19일에야 이사회를 열어 가해자로 지목된 손모 코치의 영구제명을 논의하기로 했다. 유도회는 “그간 손 코치가 잠적한 탓에 정확한 상황 파악이 어려웠다. 보도를 통해 손 코치가 성관계를 맺은 것을 인정했기에 징계에 착수할 수 있었다”고 했지만 유도인 가족을 둔 것으로 알려진 손 코치의 입장을 수개월간 듣지 못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스포츠계 성폭력 실태를 파악하고 사건이 벌어졌을 때 이를 조사할 ‘제3의 기관’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돼왔다. 체육회는 지난 15일 ‘가혹행위 및 성폭력 근절 실행 대책’을 발표하며 “폭력·성폭력 관련 사안 처리는 시민사회단체 등 외부 전문기관에 전적으로 의뢰하겠다”고 밝혔다. 국회에 발의된 ‘운동선수 보호법’ 법안에 포함된 ‘스포츠윤리센터’도 성폭력 피해 선수를 도울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선수들이 2차 피해 우려에도 자신의 실명을 걸고 폭로한 뒤에야 겨우 논의가 진전되고 있다.

Posted by 윤승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