힉스의 2012년 모습 / 위키피디아
데이비드 힉스(38)는 아버지 테리 힉스의 말을 빌면 “인디애나 존스처럼 방랑과 모험을 즐기는 청년”이었다. 데이비드 힉스는 14살 때 마약 때문에 퇴학을 당한 뒤 집을 떠났다. 목장 일꾼, 로데오 라이더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그가 이슬람 경전인 코란을 접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힉스는 1999년 분쟁지역인 동유럽의 코소보로 여행을 떠났다가 알바니아계 무슬림들이 세르비아군에 공격 당하는 모습을 보게 됐다. 그 이후 힉스의 인생 행보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으로 가서 알카에다 훈련소에서 군사훈련을 받았고, 탈레반이 됐다는 것이다. 힉스는 2001년 12월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과 연대한 북부동맹군에 붙잡혔고, 미군에 넘겨져 쿠바 관타나모의 수용소에 가게 됐다.
백인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청년이 이슬람에 귀의하는 일은 많지만 스스로 탈레반이 되어 아프간에서 미국에 맞선 ‘무자히딘(이슬람전사)’로 싸우기까지 한 사람은 드물었다. ‘호주 탈레반’이라는 별명을 얻은 그는 다른 수감자들과 마찬가지로, 기소도 없이 5년이 넘도록 수용소에 갇혔다. 그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지난 2007년 1월, 그가 변호사에게 보낸 편지가 공개됐을 때였다. 힉스는 편지에 “여긴 생지옥이다. 나를 여기서 내보내 달라”고 썼다.
관타나모 수감자들을 재판한 미군 군사법정은 그해 2월 살인미수와 테러 지원 혐의로 힉스를 기소했다. 힉스는 관타나모 수감자들 중 처음으로 재판받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 살인미수 혐의는 증거불충분으로 기각됐지만 테러 지원은 유죄로 인정됐다. 재판 받기까지의 관타나모 수감 기간을 고려해, 힉스는 징역 9월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힉스가 지난 5일 뒤늦게 미국 항소법원에 항소를 했다고 AFP통신이 보도했다. 그는 내가 무고하다는 것과, 내가 겪은 일들이 잘못됐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항소했다”고 밝혔다. 그는 “관타나모에서 지낸 시간들 여전히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통스럽다”고 말했다. 힉스는 2010년 펴낸 자서전에서 관타나모 수감 기간을 ‘지옥의 6년’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그는 5년 동안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지하 독방에 살면서 몸이 묶인 채 맞거나 잠을 못자는 등 고문을 겪었다고 말했다.
미국의 대테러전에 적극 협력했던 호주 정부는 힉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힉스가 수감돼 있을 당시 호주의 총리였던 존 하워드는 힉스 송환 노력을 하지 않다가 2007년 2월에서야 미국 정부에 조속한 재판을 요구했다. 힉스는 위키리크스를 설립한 호주 출신의 줄리언 어산지를 언급하며 “어산지가 관타나모 수감 같은 어려운 상황에 놓여도 호주 정부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 1월 취임 일성으로 관타나모 수용소를 폐쇄하겠다고 말했지만, 관타나모에는 여전히 법적 근거 없이 붙잡혀온 사람들이 ‘테러용의자’라는 이유만으로 수감돼 가혹행위를 당하고 있다. 그중 일부는 12년째 수감중이다. 마이애미헤럴드에 따르면 지난 8월 현재 관타나모에는 164명이 갇혀 있다. 올들어서도 가혹한 처우를 못견딘 수감자들의 단식투쟁과 자살기도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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