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의 봄’이 한창이던 2011년 아흐메드 알 다라위(38)는 이집트 민주화의 성지 타흐리르 광장에서 민주화 시위대의 선봉에 있었다. 3년 뒤 그는 수니파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의 조직원이 돼 이라크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민주화를 꿈꿨던 이상주의자는 어떻게 IS의 전사가 됐을까. 이 과정을 파이낸셜타임스가 다라위의 가족들과 동료 운동가들의 증언을 토대로 3일 보도했다.
다라위는 수도 카이로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다른 형제들처럼 경찰대에서 대학 교육을 받았다. 폭력과 부패에 환멸을 느껴 경찰을 그만뒀지만, 아랍에미리트연합(UAE) 통신사의 마케팅 매니저가 돼 매달 7000달러를 벌었다.
이집트 혁명 후 분열에 환멸, 결국 이슬람 무장세력 투신
경찰로 살며 ‘개혁이 필요하다’고 느껴왔던 다라위는 2010년 민주화운동 단체에 가입했다. “가족들과 직업에 지장을 줄 수 있다”며 동료들이 만류했지만 그는 민주화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2011년 호스니 무바라크 독재정권은 물러났다. 그러나 2012년 12월 민주화 세력이 이슬람과 세속주의로 분열돼 충돌하는 모습을 지켜본 그는 이집트의 혁명에 환멸을 느꼈다.
동료 활동가였던 야세르 알 하와리는 “지난해 7월 군부 쿠데타 이후 솔직하고 긍정적이던 다라위는 폐쇄적인 사람이 됐다”고 말했다. 비교적 온건한 성향의 다라위가 이슬람 극단주의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때였다. 또 다른 동료 무함마드 아바스는 “다라위는 민주화 시위가 내전으로 번진 시리아를 보면서, 우리가 저 사람들을 어떻게 구할 수 있을지 항상 이야기했다”고 말했다.
결국 지난 2월 “부모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동생에게 남긴 채 다라위는 이라크로 떠났다. 그가 숨진 이유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이 없다. 런던정경대 중동정치학 교수 파와즈 저제스는 “(다라위는) 아랍의 봄이 주었던 희망이 어떻게 절망으로 변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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