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넥센 조상우, 두산 함덕주, LG 정찬헌, 한화 정우람. 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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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이 적은 투수에게 마무리 투수 자리를 맡기는 것은 도박에 비유되기도 한다. 적은 점수 차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기 공을 던지려면 대개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 그래서 한 시즌의 마무리 투수 자리는 과거 마무리를 경험해본 선수에게 돌아가고, 그들 중에서 리그 최고의 마무리가 가려지게 마련이다.

한층 치열한 불펜싸움이 매경기 벌어지고 있는 올 시즌 KBO리그에서는 세이브왕 경쟁이 조금 다른 양상으로 펼쳐지고 있다. 세이브 부문 상위 선수들 중 다수가 올해 풀타임 마무리를 처음 맡은 이들이다.

22일 현재 4명의 투수가 세이브 상위권을 형성하고 있다. LG 정찬헌이 세이브 7개로 이 부문 1위이고, 두산 함덕주, 넥센 조상우, 한화 정우람이 6세이브로 공동 2위다. 공교롭게도 이들 4명 중 정우람을 제외한 세 명은 모두 올시즌 풀타임 마무리를 처음 맡는다.

매년 세이브 부문 상위 5걸에는 풀타임 마무리 경험자들이 2명 이상씩 포진해 있었다. 김세현(당시 넥센)이 풀타임 마무리 첫 해 36세이브를 올려 세이브왕을 따낸 2016년에도 NC 임창민과 SK 박희수(이상 26세이브), 두산 이현승(25세이브) 등 최소 한 시즌씩 풀타임 마무리를 경험한 선수들이 세이브 부문 상위권을 차지했다. 하지만 올해는 다르다. 세이브왕 출신 KIA 김세현(4세이브)과 롯데 손승락(3세이브)의 성적은 아직 선두권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마무리까지 안착하게 된 계기도 다양하다. 150㎞대 강속구를 앞세워 필승조로 뛰던 조상우는 2016년 부상, 지난해 선발 전환을 접고 올해 붙박이 마무리로 낙점받았다. 역시 빠른 공과 두둑한 배짱이 장점으로 꼽혔지만 정작 풀타임 마무리와는 거리가 멀던 정찬헌은 기존 마무리 임정우의 시즌 아웃 등을 계기로 마무리를 맡았다.

함덕주는 시즌 전까지만 해도 5선발 자원으로 분류됐으나 시즌을 불펜에서 시작했다. 기존 마무리 김강률이 부진해 지난 12일 2군으로 내려가자 두산은 상황에 따라 투입하는 ‘집단 마무리’ 체제를 가동했는데, 일단 함덕주가 잘 버텨줬다. 정우람은 2016년 한화 이적 이후 풀타임 마무리를 쭉 맡아왔다. 올 시즌 초 젊은 선수 위주로 재편된 불펜이 접전 상황을 잘 지키면서 세이브 기회를 꽤 얻었다.

정우람을 뺀 셋이 첫 풀타임 마무리를 맡았는데도 예상 외로 선전 중인것은 그만큼 가능성이 있던 자원들이었기 때문이다. 조상우와 정찬헌은 빠른 공을 무기로 지난 몇 년간 ‘미래의 마무리감’으로 꼽혀왔다. 함덕주의 속구 구속은 140㎞ 초반에 머물지만 배짱이 두둑한 데다 지난 시즌 처음 선보인 체인지업이 우타자들에게 효과를 보면서 마운드 핵심 자원으로 거듭났다.

작은 변화들도 있었다. 야구 통계 사이트 스탯티즈에 따르면 정찬헌은 지난해 약 45%였던 직구 구사 비율을 올해 38%정도로 낮추는 대신 커브와 스플린터 구사율을 각각 6~7%포인트 정도 늘렸다. 반면 조상우는 직구 구사율을 59%에서 70%까지 늘리는 등 빠른 공에 집중하면서 직구 평균구속도 145㎞에서 151㎞까지 올렸다. 정우람은 지난해보다 슬라이더 구사를 줄인 대신 체인지업을 늘려 재미를 보고 있다.

물론 아직 이들이 모두 ‘끝판왕’급의 안정적인 마무리로 정착한 것은 아니다. 정찬헌과 조상우는 블론세이브도 벌써 2개씩 기록(공동 3위)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이들이 전보다 더 인상적인 피칭을 펼치고 있고, 팬들에게 더 많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Posted by 윤승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