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재균, 박병호에 이어 김현수까지…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에 진출했던 KBO리그 선수들 셋이 일제히 유턴했다. 수십억원대 거액 계약을 맺었거나 맺을 예정인 이들이 다음 시즌 ‘돈값’에 걸맞는 활약을 할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보다 먼저 미국에서 한국 리그로 ‘복귀’한 선수들의 첫 시즌 성적은 어땠을까.
▲LG 이상훈(2002년)7승 2패 18세이브, 평균자책점 1.68
‘야생마’ 이상훈은 1997시즌 뒤 일본 프로야구(NPB) 주니치 드래건스의 유니폼을 입었다. MLB에서 뛰고 싶은 열망이 있었지만 LG는 자매구단인 주니치로 그를 보냈다. 다행히 일본에서 그는 주니치의 특급 불펜 일원으로 활약했고, 조금 돌았지만 MLB 보스턴 레드삭스에 입단하며 빅리거의 꿈을 이뤘다. 그러나 한·미·일 프로야구에서 모두 뛴 첫 선수라는 영광도 잠시, 2000시즌 9경기에 등판해 11.2이닝을 던진데 그쳤다.(승패없이 평균자책점 3.09) 마이너리그에서 머문 시간이 더 많았던 이상훈은 결국 2002년 5월 LG의 마무리투수로 다시 복귀했다.
당시 이상훈은 1년 연봉 4억7000만원의 계약을 맺었다. 당시 국내 프로야구 최고액이었다. 그해 이상훈은 52경기에 등판하는 동안 85.2이닝을 던졌다. 그리고 팀의 가을야구 진출, 돌풍, 한국시리즈 진출에 일조했다. 다만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9대6으로 앞서다가 이승엽에게 동점 3점홈런을 맞은 장면은 그의 ‘흑역사’로 남았다. LG는 동점 후 투수를 최원호로 교체했지만 이승엽 다음 타자인 마해영이 끝내기 홈런으로 삼성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안겼다.
이상훈은 이듬해 당시 국내스포츠 선수들 중 최초로 6억원의 연봉을 받는 선수가 됐다. 55경기에 등판해 30세이브를 거뒀다. 그러나 구단 프런트와의 갈등으로 팀을 SK로 옮겼고, 돌연 은퇴했다.
▲한화 구대성(2006년) 3승 4패 37세이브, 평균자책점 1.82
‘대성불패’ 구대성은 1999년 한화의 첫 우승을 안겼고, 이듬해에도 48경기에서 무려 133.1이닝을 던지면서도 평균자책점 2.77, 21세이브를 기록했다. 이상훈과 마찬가지로 구대성도 일본에 먼저 진출했다. 자매구단 오릭스로였다.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전천후로 뛰다 2005시즌 뉴욕 메츠의 유니폼을 입었다. 주로 왼손 원포인트릴리프로 33경기에 나와 23.0이닝 평균자책점 3.91을 기록했다. 당시 리그 최고 에이스 랜디 존슨(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를 상대로 깜짝 2루타를 치고, 더 깜짝 놀랄 주루플레이로 홈까지 밟았다. 그런데 그 슬라이딩 과정에서 다쳐 페이스를 잃었고 빅리그 경험은 한시즌 만에 끝났다.
구대성은 2006시즌 한화로 돌아왔다. 연봉은 5억3400만원. 그리고 그해 개인 최다인 37세이브를 기록했다. 팀도 7년만에 한국시리즈에 올랐다. 한화에 더 고무적이었던 건 구대성이 루키 류현진의 멘토 역할도 했다는 것이다. 류현진은 ‘레전드’ 선배들의 조언과 가르침을 받으며 ‘괴물’로 성장했다. 하지만 이듬해 38세가 된 구대성은 성적이 하락세에 접어들었다. 2007시즌 26세이브, 평균자책점 3.19를 기록한 뒤 이후 세 시즌 동안 세이브는 1개를 수확하는데 그쳤다. 2010시즌 은퇴경기를 끝으로 KBO리그를 떠난 구대성은 그러나 호주 프로야구 리그 시드니 블루삭스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갔다.
▲삼성 임창용(2014년) 5승 4패 31세이브, 평균자책점 5.84
해태에서 데뷔해 삼성에서 전성기를 꽃피운 임창용은 ‘애니콜’이란 별명처럼 때로는 선발로, 때로는 마무리로 등판했고, 부상으로 2006시즌을 사실상 쉰 뒤 2007시즌에도 뚜렷한 자리를 잡지 못했다. 40경기(21선발) 등판해 5승 7패 3홀드, 평균자책점 4.90. 그런데 일본 프로야구 야쿠르트 스왈로스에 진출했다. 통산 100세이브를 넘게 거둘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미국 진출 꿈을 키우던 임창용은 결국 2013시즌 37세의 늦은 나이에 시카고 컵스와 계약을 맺었다. 시즌 후반엔 빅리그 마운드도 밟았다. 6경기에서 5이닝을 던지는 동안 3자책점을 내줘 평균자책점은 5.40이었다.
그것이 임창용의 처음이자 마지막 빅리그 시즌이었다. 오승환의 일본 진출로 빈 삼성 마무리 자리를 2014시즌부터 맡았다. 연봉은 5억원이었다. ‘창용불패’는 10시즌만에 30세이브(2004시즌 36세이브·2014시즌 31세이브)를 넘겼다. 그러나 평균자책점은 5.84에 달했고, 블론세이브도 9개로 많았다. 이듬해에도 삼성에서 마무리투수로 33세이브, 평균자책점 2.83을 기록했다. 블론세이브도 5개로 줄였다. 하지만 ‘불법 도박 파동’에 연루되며 이미지를 완전히 구겼고. 한국시리즈에도 출전하지 못한채 팀의 패배를 지켜봐야했다. 이듬해 72경기 출장 정지를 감수하면서까지 고향팀 KIA로 팀을 옮겼지만 나이에 따른 체력 문제 때문인지 마무리 보직은 맡지 않고 있다.
▲KIA 윤석민(2015년) 2승 6패 30세이브, 평균자책점 2.96
2011시즌 MVP를 기록했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땄고 2009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준우승 멤버였다. 그래서 윤석민을 둘러싼 질문은 ‘미국에 진출할 수 있을까’라기보다는 ‘언제 진출할까’ ‘어느 팀에 진출할까’ ‘얼마에 진출할까’였다. ‘지한파’로 잘 알려진 댄 두켓 단장이 윤석민을 2014시즌 볼티모어 오리올스로 데려왔다. 하지만 빅리그의 마운드는 높았다. 볼티모어 산하 트리플A팀 노포크 타이즈에서 23경기(선발 18경기)에 나와 4승 8패, 평균자책점 5.74를 기록하는데 그쳤다. 볼티모어 유니폼을 입고 입단했지만 정작 그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는 밟지 못했다.
그리고 국내로 돌아왔다. 4년 90억원의 FA 계약이었다. 리그에서도, 국가대표로도 선발과 중간·마무리를 오갔던 윤석민은 미국에서 선발로 많이 뛰었지만 2015시즌 국내에선 마무리투수가 됐다. 보직이 바뀌었던 것은 어느 보직이든 곧잘 해냈기 때문이었다. 그해 마무리 자리도 그렇게 해냈다. 4년째 가을야구에 실패한 침체기 KIA에서 30세이브 투수가 됐다.
하지만 부상 탓에 침체기가 길어졌다. 2015시즌 51경기를 뛰었던 윤석민은 이듬해 3분의 1에도 못미치는 16경기에 나오는데 그쳤다. 시즌 막판 중간계투진에 합류하며 홀드를 6개 따냈지만 예전의 구위가 아니었다. KIA의 8년만의 우승 시즌에는 아예 쉬었다. 미국에서 부진하다 한국에 복귀해서 고액 계약을 맺었더니 왜 출장을 하지 못하고 있느냐는 비판도 피하지 못했다.
▲롯데 이대호(2017년) 타율 3할2푼, 34홈런 111타점
‘거인의 심장’ 이대호는 2010시즌 타율 3할6푼4리, 44홈런 133타점을 비롯해 ‘타격 8관왕’에 오르며 절정의 기량을 뽐냈다. 다음 시즌에도 3할5푼7리의 고타율을 뽐낸 뒤 일본으로 진출했다. 오릭스 버팔로스와 소프트뱅크 호크스에서 도합 4시즌을 뛰면서 일본시리즈 우승도 맛봤다. 그러다 적지 않은 34세의 나이에 미국 진출에 도전했다. 적은 금액에 적지 않은 경쟁자들과 스프링캠프부터 경쟁했지만 시즌 개막을 빅리그에서 맞을 수 있었다. 시즌이 시작된 뒤에는 애덤 린드와 ‘플래툰’으로 기용됐고 부상으로 마이너리그로 잠시 내려가기도 했다. 2할5푼3리에 14홈런 49타점으로 시즌을 마쳤다.
그리고 이대호는 다시 고향팀으로 돌아왔다. 6시즌만에 롯데 4번자리를 지켰다. 강타자를 상징하는 고전 지표인 타율 3할-30홈런-100타점을 모두 넘겼다. 팀도 한동안 거르던 가을야구를 치렀다. 팀 타선에서도 중심을 잡고 덕아웃에서도 구심점 역할을 했다. 현재 ‘KBO→(NPB)→MLB→KBO’라는 경로를 거친 거의 유일한 타자다.
하지만 마냥 여론이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다. 한국에 돌아오면서 받은 4년 총액 150억원이라는 역대 최고액 FA계약. 시즌 초반 폭발적이던 타격감이 식었을 때, 그리고 롯데가 5강권에서 멀어졌을 때 팬들은 이 숫자를 떠올렸다. 그 때 나타났던 반응들은, 어쩌면 황재균·박병호·김현수가 지금 두려워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롯데 최향남(2007년) 5승 12패, 평균자책점 5.00
▲KIA 최향남(2012년) 1승 3패 9세이브, 평균자책점 3.98
사실 최향남도 ‘미국 유턴파’에 해당한다. KBO리그에서 데뷔했고, MLB를 목표로 삼고 미국에 진출했으며, 다시 한국에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일을 두 번 했다. 그는 1990년대말 강팀이던 LG 선발진 한 축을 맡았고, ‘타고투저’ 1998시즌에는 12승 12패, 평균자책점 3.63에 완투 2회, 완봉 1회를 기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두자릿수 승수를 거둔 시즌은 없었다. 2004시즌 친정 KIA로 돌아왔지만 두 시즌 동안 28경기에서 87이닝 던지는데 그쳤다.
그래서 2006년 그가 MLB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산하 트리플A 팀인 버팔로 바이슨스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거라곤 쉽게 예측하지 못했다. 성적은 8승 5패, 평균자책점 2.37. 34경기 중에 선발 11경기가 포함됐고, 투구이닝도 106.1이닝에 달했다. 적은 연봉과 많은 나이가 그에게 빅리그 진출 기회를 허락하지 않았을뿐이다.
결국 클리블랜드와의 재계약이 무산된 최향남은 2007시즌 KBO리그 세번째 팀 롯데와 계약한다. 계약금 1억원과 연봉 1억원으로 총액은 2억원이었다. 전 시즌 적잖은 선발 등판 경험 덕인지 선발로만 24경기를 뛰었다. 하지만 패수가 승수의 2배를 넘었다. 다만 2008시즌 불펜에서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마무리 임경환이 잦은 블론세이브로 무너지자 새 마무리로 선택받았다. 빠른 투구 타이밍으로 타자들을 교란시켜 얻은 별명이 ‘향운장’이었다. 차가 식기 전에 세이브를 거두고 돌아올 정도로 경기 운영 속도가 빨랐던 것이다. 시즌 막판 외국인 마무리 투수 데이비드 코르테스가 오기 전까지 9세이브를 거뒀다.
최향남은 그 시즌을 마치고 다시 해외로 떠났다. 구단에 해외 진출 의사를 밝혔고, 포스팅시스템을 통해 101달러에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우선 협상권이 주어졌다. 그러나 빅리그 마운드는 오르지 못하고 멕시칸리그와 마이너리그 마운드에 섰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자 최향남은 2012시즌 KIA로 돌아왔다. 그해 불펜이 약한 KIA에서도 다시 마무리 보직이 주어졌다. 다만 큰 힘이 되진 못했다. 9세이브로 시즌을 마쳤고, 한 시즌을 KIA에서 더 뛰다 국내에서의 선수 생활을 마쳤다. 이후 오스트리아에서 선수로 뛰다 지난해부터 최초의 대안학교 야구부인 글로벌선진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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