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에는 ‘불통’이라는 수식어가 끊이지 않았다. 국회나 정부 등 현존하는 대의민주주의 기구에 대한 불신도 오래됐다.
문재인 정부는 ‘소통’을 앞세우며 시민이 직접 정책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열었다. 청와대 국민청원과 ‘신고리 5·6호기’ ‘대입제도 개편’ 등 정부 정책에 대한 공론화위원회는 그렇게 등장했다.
시민이 직접 행정부에 정책을 제안하고, 시민참여단이 공론조사로 정한 권고안이 정책에 반영됐다.
두 제도는 그간 기술적 한계 때문에 현실화하기 어려웠던 ‘직접민주주의’의 형태로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뛰어넘을 대안이라는 기대도 받았다.
그 기대는 문 대통령 집권 5년차에도 유효할까. 두 제도의 명과 암을 들여다봤다.
윤창호법·민식이법 등 대책 마련 성과
20만 이상 64%, 특정인 처벌·해임 요구
시급한 정책·행정 개선에 초점 맞춰야
“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한다.” 문재인 정부 100일째인 2017년 8월17일 문을 연 청와대 국민청원 페이지에 적힌 글귀다. 문재인 정부가 시작과 동시에 ‘국민참여형 국정운영’을 강조하면서 내건 국정과제 중 하나가 ‘청와대 국민청원’이었다.
많은 동의를 얻은 국민청원 건은 기사화되고, 정부 정책과 국회 입법을 움직였다. 그러나 ‘한 달 내에 20만명이 동의하는 청원’만이 답변의 대상이 되면서 ‘국민 상소의 장’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청와대가 답변할 권한이 없는 내용까지 답변 대상에 오르면서 청원의 실효성마저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국민청원의 명과 암
헌법 26조에는 국민의 청원권이 명시돼 있고, 국회 입법청원과 국민신문고 등 기존 청원 창구가 있었다. 그러나 해당 절차는 요건이 복잡하거나 각 부처가 책임을 미루다 흐지부지되기 일쑤였다. 국민청원은 그런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이었다.
올해 초 한국 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문제 중 하나인 양천 아동학대 사건(정인이 사건)은 국민청원에 올라 답변과 대책을 이끌어낸 사례다. 지난해 10월 중순 보도를 통해 사건이 알려진 뒤, 19일부터 ‘아동학대 신고 관련 법을 강화해달라’는 청원이 등록돼 20만7861명의 동의를 받았다. 양성일 보건복지부 1차관이 영상을 통해 “대책을 추진하고 있다”고 답변했고, 이후 방송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학대 아동 이름과 사연이 널리 알려지며 관련 입법 논의도 급물살을 탔다. 잊힐 뻔한 사건들이 국민청원을 통해 공론화되고, 국민의 공분을 이끌며 신속하게 대책이 마련되는 효과가 있었다. 음주운전으로 인명피해를 낸 운전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한 ‘윤창호법’, 어린이보호구역 내 사망·상해사고 가해자를 가중처벌하는 ‘민식이법’이 이런 과정을 거쳤다.
‘20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은 청원’만 답변 대상으로 둔 것이 오히려 공론화되는 청원의 대상을 한정적으로 만들기도 했다. 시민들이 쉽게 분노하는 강력 사건, 공분을 일으킨 인물이 청원 대상이 됐다. 청와대가 국민청원제도를 일부 개편한 2019년 4월부터 지난해 말까지 20만명 이상이 동의한 청원은 총 114건인데, 이 중 64.0%(73건)는 특정인을 처벌하거나 해임·면직해달라는 요구였다. 추미애·조국 법무부 장관 등 장관급 인사를 해임하거나 임명하지 말라는 청원, 윤석열 검찰총장과 김무성·나경원 전 자유한국당 의원,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 등을 수사·처벌하라는 내용도 있었다.
정치 세 대결이 벌어지기도 했다. 2019년 4월에는 더불어민주당과 한국당에 대한 정당 해산 청원이 각각 이뤄졌고, 같은 해 8월 중순에는 조국 법무장관 임용에 대한 찬반 청원이 동시에 진행됐다. 지난해 2월 말에는 문재인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는 청원과 지지·응원한다는 내용 등 상반된 청원 총 4건이 동시에 진행됐다.
특정 집단에 대한 공분도 청원 대상이 됐다. 8·15 광화문집회에 참석해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사람에게 치료비를 지원하지 말라거나 전 언론에 대해 세무조사를 하라는 청원 등이 그 예다.
청와대가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는 청원이 많다는 것도 문제다. 2019년 4월 이후 청와대가 답변한 청원 중 문 대통령 탄핵 및 법원 인사를 포함해 ‘청와대·행정부에 답변 권한이 없다’고 한 건은 20건이다. ‘국회가 아직 법안을 입법하지 않았다’거나 ‘판결이 확정되지 않았다’며 입법·사법부 결정 뒤에 방침을 정하겠다고 한 건은 21건이다. 수사 중인 건(11건)이나 청원 내용이 사실과 다르거나 ‘박원순 서울시장 5일장 반대’ 등 청원 완료 전 결론이 난 건(30건)까지 합하면 분석 대상의 69.3%(중복 포함 총 79건)는 의미있는 해결책을 내지 못했다.
직접 민주주의 학습 vs 대의제 형해화
국민청원에 의미가 있다는 평가도 있다. 이원재 Lab2050 대표는 “국민청원은 직접민주주의를 위한 전환기의 장치”라고 했고, 이준웅 서울대 교수도 “국민청원은 학습의 과정”이라고 말했다.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20만명 이상 동의한 청원에 답한다’고 한 원칙이 국민청원을 ‘분노를 배출하는 상소의 장’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2019년 4월 제도 개선 이후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삼권분립 정신을 훼손할 소지가 있는 청원에 답변이 제한될 수 있다’는 등 안내사항이 추가됐지만, 이후에도 답변 가능 여부와 관계없는 청원은 멈추지 않았다. 정동재 한국행정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실질적인 개선방안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보이는 청원은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하는 반면, 자극적인 내용들만 청와대의 답변 대상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민식이법’처럼 사망자가 발생한 경우에는 빨리 관심을 끌어 대책을 이끌어내지만, 사전에 교통사고를 예방하자는 청원은 동의 수가 적어 폐기되는 식이다. 정 부연구위원은 “어느새 충실한 답변을 얻는 것보다 동의를 많이 얻는 것이 주목적이 돼버렸다. ‘얼마나 시급한 정책·행정 개선을 요구하는가’에 맞출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은 저서 <청와대 정부>에서 “대의기관에 대한 시민들의 강한 불신과 반감 탓에 청와대 국민청원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이었다”면서도 “대의기관의 역할을 고려하지 않은 채 모든 사회 이슈와 현안을 주도하는 방식에 대한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하헌기 새로운소통연구소 소장도 “국민 의견을 국정에 반영하는 기관은 국회”라며 “대의기관에 대한 불신이 심화되고 통치기관에 읍소하듯 청하는 문화는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동재 부연구위원은 지난해 보고서에서 “국회의 국민동의청원을 청와대 국민청원과 연계하는 방안도 고려해볼 만하다”고 지적했다.
윤승민·김지원 기자 me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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