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법은 어떻게 좌절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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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 산업재해 유가족들이 국회 앞에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연내 제정을 요구하며 단식을 이어갔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연내 제정’을 목표로 세웠지만 실패했다. 해가 바뀐 지금도 단식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법 제정 논의가 여론의 관심 속에 활발해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은 조금 나은 경우일지도 모른다. 노동자들과 소비자들의 권리, 저소득층이 양질의 공공의료 혜택을 받을 권리, 성소수자들도 차별 없이 살아갈 권리…. 국회 밖에서의 외침은 늘 이어지지만 문턱을 넘어 논의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시민들은 국회 본회의장에서 의원들이 뒤엉키고 고성이 오가는 ‘동물 국회’를 보며 눈살을 찌푸린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들 주권자의 입법 요구가 실현되기는커녕 좀체 본회의장까지도 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입법권은 국회에 속한다.’ 헌법상 국회에 대한 첫 조항 40조는 국회를 ‘입법기관’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국회의 입법 기능, 즉 입법 민주주의는 현재 부분적으로만 작동한다. 입법의 열쇠를 쥐고 있는 정치권과 관료, 경제권력 중 반대하는 사람이 적은 속칭 ‘비쟁점 법안’, 그리고 ‘쟁점 법안’ 중 정치권의 선택을 받은 일부 법안 정도가 입법된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입법 단계를 따라 그 과정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민주주의의 한 축인 ‘입법부’의 입법 편향성을 들여다봤다.

그 많던 발의안은 어디로 갔을까

20대 국회 발의 법안 2만4141건
역대 최다지만 입법은 3195건뿐
의원들 ‘평가 의식’ 건수만 늘려
공무원인 전문위원 영향력 커져

식품 내 유전자변형작물(GMO) 함유 여부를 표시해야 한다는 ‘GMO 완전표시제’를 담은 식품위생법 개정안은 2016년 20대 국회 개원과 거의 동시에 발의됐다. 지금은 GMO를 원료로 쓴 식품에서 유전자 변형 단백질 등이 검출되지 않으면 GMO 원료 사용 여부를 표시하지 않아도 된다. GMO를 원료로 쓰지 않은 상품에 ‘Non GMO’를 표시하는 것도 불법이다.

식품업계는 “‘Non GMO’ 표시가 없는 식품이 유해한 식품으로 매도당할 수 있고, ‘Non GMO’ 표시 식품에 프리미엄이 붙으면 생활 물가도 오른다”며 반대한다. GMO의 유해성이 과장됐다는 논란도 있다. 하지만 소비자의 알 권리를 위해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돼야 한다며 ‘완전표시제’는 호응을 받았다. 2018년 청와대 국민청원에 모두 21만명이 참여했다.

20대 국회에서 4차례 발의된 GMO 완전표시제 관련 법안이 상임위원회인 보건복지위원회에서 논의된 적은 법안별로 한차례씩뿐이었다. 2017년부터는 찬반 의견이 국회에서 논의될 기회조차 없었고, 법안들은 지난해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한 법안을 대표발의한 김현권 전 민주당 의원은 “다른 상임위 소속이었는데도 복지위에서 법안 도입 필요성에 대해 설명했다. 하지만 그 이후 법안이 왜 논의가 안 됐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당시 복지위 소속으로 법안을 발의한 윤소하 의원실의 박선민 보좌관(현 이은주 정의당 의원실)도 “현 정부 출범 당시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긍정 검토하는 듯 했으나 어느 순간 논의가 멈췄다”며 “논의가 멈춘 자세한 사정은 모른다”고 했다.

폭력 없는 스토킹을 경범죄로 처벌하는 현행법을 넘어 강력범죄로 처벌하자는 ‘스토킹방지법’ 제정안은 20대 국회에서 5건 발의됐으나 3건만 해당 상임위인 법제사법위에서 한차례씩 논의되다 폐기됐다. 기초연금을 받은 65세 이상의 기초생활수급자가 다음달 기초생활급여를 받을 때 기초연금액수만큼 차감되는 ‘줬다 뺏는 기초연금’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국민기초생활보장법’ 개정안도 2016년 10월 총 3건이 복지위에 상정된 뒤 폐기됐다. 20대 국회에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의 운명도 비슷했다. 당시 노회찬 정의당 의원이 2017년 4월 ‘재해에 대한 기업 및 정부책임자 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대표발의했으나 같은 해 9월 법사위에서 한차례 안건으로 상정된 뒤 폐기됐다.

국회에서 법안은 의원과 정부의 발의를 통해 탄생한다. 20대 국회에서 발의된 법안만 총 2만4141건이었다. 이 중 실제 입법된 경우는 3195건이다. 내용이 비슷해 다른 법과 합쳐진 ‘대안반영폐기’ 법안은 5563건이며, 임기 만료를 이유로 자동 폐기된 법안이 1만5002건으로 가장 많다. 대부분의 법안들은 상임위에서 계류되다가 폐기되는 운명을 맞는다. 상임위에 상정됐다가 이견이 있다며 산하 소위원회(소위)로 빠지고, 소위에서 제대로 논의도 못한 채 사라지는 경우가 가장 많다.

쟁점·비쟁점… 법안에도 ‘신분’이 있다

국회 입법에서 가장 흔하게 거론되는 문제는 지나친 ‘입법 경쟁’이다. 어떤 입법을 하느냐보다, 얼마나 많이 입법하느냐에 의원들이 몰두하고 있다는 것이다. 20대 국회의 법안 발의 건수는 역대 최다다. 국회 미래연구원의 지난해 10월 보고서를 보면, 발의 건수(2만4141건)는 19대(1만7822건)의 1.3배, 18대(1만3913건)의 1.7배 수준이다. 국회의원 300명이 4년 임기 동안 평균 80.5건을 발의하는 꼴이다. 이는 영국(0.88건)이나 일본(1.3건)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고, 미국(40.6건)의 2배다.

국회 보좌진들은 “의원이 얼마나 많은 법을 발의했는지가 언론과 시민사회의 평가대상이 된 이후 이런 경향이 뚜렷해졌다”고 입을 모은다. 김상훈 국민의힘 의원실의 홍지웅 보좌관은 “지역구 의원들은 지역 언론에서 법안 발의 건수를 평가할 때 특히 예민하다”며 “의원의 지시가 없이도 보좌진들이 ‘입법 성과가 적은 의원으로 평가받을까’ 두려워 ‘쉬운 법안’을 양산한다”고 말했다.

‘쉬운 법안’이란 거세게 반대하는 이해 당사자가 없고, 조문이나 숫자를 고치는 정도로 조금만 공을 들이면 통과시킬 수 있는 법안이다. 국회에서는 이를 ‘비쟁점 법안’이라 부른다. 이들 ‘쉬운 법안’은 의원의 발의 건수와 통과 건수를 늘린다.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사실 미미하다.

반면 ‘쟁점 법안’들은 이해관계가 첨예하고 협의도 많이 필요해 입법에 시간이 걸린다. 사회적 영향이나 파급효과는 크지만 정부나 기득권의 반대, 혹은 정치적 이해관계가 큰 법안이라, 동료 의원들과 정부 및 관련 기관들을 모두 설득해야 한다. 정부가 ‘예산 문제’를 들면 법안은 일단 큰 장벽을 마주하게 된다. ‘검찰개혁’이나 ‘공정경제 3법’ 등 언론의 주목을 받는 법은 그나마 사정이 낫다. 조직화되지 못한 시민, 소수자와 약자들의 법안은 상임위 등에 상정되기만 할 뿐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입법 경쟁의 또 다른 폐해는 상임위 전문위원들의 입김이 세졌다는 점이다. 전문위원들은 입법활동 지원을 위해 국회사무처에서 각 상임위에 배정한 입법공무원일 뿐이다. 하지만 상임위 안건으로 오르는 법안이 너무 많아지고 의원들이 법안을 자세히 보기 어렵게 되자, 전문위원들이 쓰는 검토보고서의 영향력이 매우 커졌다.

검토보고서에는 법안의 법리적 문제와 정부 입장이 적혀 있다. ‘쟁점·비쟁점’ 법안을 한눈에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상임위의 각 당 간사들은 이를 토대로 비쟁점 법안부터 통과시키려 한다. 검토보고서가 이처럼 가이드라인 역할을 해, 국민을 대의해 선출된 의원들보다 공무원인 전문위원의 입법 영향력이 더 커진다. 의원들이 도리어 전문위원을 찾아가 ‘법안을 잘 봐달라’며 읍소하는 광경도 심심찮게 벌어진다.

법사위라는 ‘문고리 권력’

이해관계 큰 쟁점 법안 열쇠 쥔
‘상원’ 법사위 자체가 정쟁 도구
소수자·약자들 법안 상정돼도
논의도 못하고 사라지기 일쑤

상임위 통과 법안은 법사위에서 체계자구심사를 받는다. 법안이 헌법조항을 위배하지 않는지, 다른 법률과 충돌하지 않는지 등을 살피는 절차다. 원칙적으로는 법리적 문제가 있는지 검토하는 것이지만, 법사위원들이 조문 하나를 문제 삼아 법안 통과를 막을 수도 있다. 반대로 법사위원장이 법안 통과를 강행한 전례도 있다.

상임위를 통과한 ‘쟁점 법안’ 중 법사위에서 소리 없이 논의가 막히는 것들도 있다. 2018년 9월 복지위를 통과했던 ‘국민건강증진법’ 개정안이 단적인 예다. 지방자치단체가 ‘금주구역’을 조례로 지정하도록 근거를 만들고, 청소인력의 간접흡연을 막기 위해 금연구역 청소시간을 규정하자는 내용 등이 담겼다. 이 법안은 법사위 소위에서 두 차례 체계자구심사만 하다 결국 폐기됐다. 담배 성분공개에 대한 법안 내용을 보건복지부 소관으로 둘지, 기획재정부 소관으로 둘지가 논란거리였다. 박선민 보좌관은 “당시 복지위 위원들이 ‘해당 부분은 기재부 소관으로 두는 것이 좋겠다’는 연서를 냈는데도 논의가 진행되지 않았다”면서 “이 역시 왜 논의가 진전되지 않았는지 의문으로 남아있다”고 말했다.

체계자구심사는 필요하지만, 그 권한을 사실상 넘어 법사위가 ‘상원’ 노릇을 하면서 생기는 문제는 여러가지가 있다. 법사위원장을 차지하기 위한 여야의 정쟁만이 문제가 아니다. 법사위 개최 여부가 정쟁 수단으로 쓰이면서 법안 통과를 막으려고 회의를 열지 않는 경우도 생긴다. 그 때문에 함께 법사위에 상정된 다른 법안들도 논의 기회를 잃거나, 부실하게 논의된다. 민주당 한 보좌관은 “상임위를 통과한 법안은 그만큼 반대를 뚫고 입법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그러나 정쟁 탓에 법사위원장이 회의 자체를 안 열어버리는 문제가 생긴다”고 말했다.

정부가 상임위·법사위에서 실질적으로 두 차례 거부권을 행사하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정부는 상임위나 법사위에서 법안을 논의할 때 모두 참여해 의견을 낼 수 있다. 반면 상임위에서 법안을 통과시킨 의원이 다시 법사위에서 논의 진행 상황을 일일이 확인하고 직접 목소리를 내기는 쉽지 않다.

‘어차피 법사위에서 엎어질 수 있다’는 생각은 역으로 상임위에서의 논의를 부실하게 만든다. 한편으로는 법사위원이 다른 상임위의 법안까지 들여다보면서 피로감을 느끼는 문제도 있다. 대안으로 체계자구심사 기구를 법사위 외에 별도로 두거나, 상임위 내에 소위를 만들어 체계자구심사까지 마치고 법안을 본회의로 바로 회부하도록 하자는 의견도 제기된다.

좌표 찍힐라, ‘인권’ 들어가면 철회·폐기
정치 세력 다양화, 거대 양당 ‘비례 정략’에 막혀

‘인권’ 들어가면 ‘철회’되는 법안

어떤 법안들은 이런 지지부진한 과정조차 밟지 못한다. 대표적인 법안이 ‘차별금지법’이다. 19대 국회에서 차별금지법은 두차례 발의됐다가 얼마 못가 폐기됐다. 공동발의한 의원들에게 항의 전화가 빗발쳤고, 결국 한두 명이 철회를 요청하면서 공동발의 최소 요건(10명)을 채우지 못한 것이다.

‘인권’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법안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2019년 2월 말 이정미 정의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성차별·성희롱 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안’은 성차별 개념을 법으로 정의한다는 조문을 담고 있었다. 반동성애 세력은 “‘성’의 범위를 ‘양성’으로 한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성애 차별금지’가 될 수 있다”며 반대 운동을 벌였다. 2018년 8월 정성호 민주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인권교육지원법안’은 초·중학교와 군대에서 지속적으로 인권교육을 시행하는 것이 골자였으나, 반동성애 세력의 집중 포화를 받았다. 두 법안 모두 한달여 만에 철회됐다.

입법 과정에서 집단행동은 더욱 일상화되고 정교해지고 있다. 특히 20대 국회 들어 이런 현상이 더욱 두드러졌다고 한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의원실 전화번호와 질문을 공유해 한 의원실이 서로 다른 사람으로부터 같은 질문을 받았다. 의원실의 응답은 커뮤니티에 동시에 공유되고, 응대를 잘 못하는 의원실이 생기면 ‘좌표’가 찍힌다.

김현권 전 의원은 “시민의 정치 참여 과정에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걸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지만, 정치인을 자유롭게 둘 때 더 창의적인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까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고 말했다.

사라진 정책 조정…정당도 역할 해야

국회를 둘러싼 환경이 입법활동을 위축시키기도 하지만, 의원과 정당들도 책임 있는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국민의당 비례대표로 20대 국회에 입문했던 채이배 전 의원은 “지역구 의원들에게는 입법활동보다 유권자들을 위한 사업이나 예산을 하나 더 따오는 것이 재선에 더 중요하다”며 “입법에 전혀 신경 안 쓰고도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지역구 주민들의 요구를 채워주는 것 또한 국회의원의 중요한 역할이다. 이 때문에 다양한 분야, 특히 소수자들을 대변할 비례대표나 다양한 정치 세력들의 국회 진출 기회를 늘리는 것이 대안으로 꼽힌다.

하지만 이런 취지로 2019년 12월 공직선거법을 개정하며 도입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거대 양당의 정략적 ‘총선용 비례정당’의 등장과 함께 누더기가 됐다.

거대 양당의 대립적 국회 독점의 폐해는 이뿐만이 아니다. 그동안 정당은 정책조정 기능과 능력을 상당수 잃었다. 채 전 의원은 “20대 국회 전반기만 해도 거대 양당과 3당이던 국민의당 간 원내대표뿐 아니라 수석부대표, 정책위의장 간 회동이 많았다. (하지만) 패스트트랙 국면부터는 원내대표 간 담판으로 조정되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말했다.

지난해 4월에는 본회의에서 부결됐던 법안과 큰 차이 없는 법안이 다시 본회의에 상정돼 가결되는 전례없는 상황도 벌어졌다. ‘KT 특혜법’이라고도 불린 ‘인터넷전문은행 설립·운영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이었다.

인터넷은행 대주주 심사자격에서 ‘공정거래법 위반 기업’을 빼자는 내용으로, 담합으로 공정거래법 위반 전력이 있는 KT가 인터넷전문은행 케이뱅크의 대주주가 되는 것을 가능케 하는 법이었다. 3월 376회 국회 본회의에서 반대토론 끝에 부결됐으나, 미래통합당에서 ‘민주당이 합의를 깼다’며 반발했다.

결국 공정거래법 중 ‘불공정거래행위 및 특수관계인에 대한 부당한 이익제공’을 하지 않으면 대주주가 될 수 있다는 내용의 법안이 4월29일 377회 국회 본회의에 상정돼 통과됐다.

당시 채 전 의원은 반대토론에서 “오늘 찬성한다면 ‘법도 모르고 투표했다’고 자인하는 꼴”이라고 말했지만, 결국 3월 ‘반대’표를 던진 수십명의 민주당 의원들이 한달 만에 찬성으로 돌아섰다.

채 전 의원은 “금융당국 주도로 낸 법안을 민주당은 야당일 때 반대했으나, 여당이 되자 반대하던 논리와 들었던 문제점을 다 잊고 ‘우리 법안’이라며 통과시켰다”며 “이런 상황을 맞은 법안들은 아무도 제어하지 않고 통과되는 문제가 생긴다”고 말했다.

윤승민·조문희 기자 mean@kyunghyang.com

 

■특별취재팀

백승찬·조문희(이상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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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승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