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이 말하는 ‘위기의 민주주의’
‘코로나’라는 재난, 약자 먼저 쓰러뜨려
이전부터 소리 없이 곪고 있던 문제들
삶 안정시킬 수 있는 큰 비전이 필요
2020년 한 해를 할퀴고 간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은 한국 사회의 상처들을 드러냈다. 재난은 약자들을 먼저 쓰러뜨렸고, 듬성듬성한 안전망 사이 존재들을 위협했으며, 기존 제도가 닿지 못하던 곳을 노렸다.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을 뿐 소리 없이 곪고 있던 문제들이다.
사회는 각자에게 정당한 몫을 나누어주고 있는가? 한국 사회의 약자는 누구인가? 보편 복지는 필요한가?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돌봄 등 필수 노동은 제 가치를 인정받아왔나? 전 지구적 감염병은 한국 사회, 나아가 전 인류의 공생을 위해 그간 당연하게 여겨져왔던 것들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들을 남기고 있다.
경향신문은 2021년을 맞아 각 분야의 전문가·학자·활동가 62명에게 현재 한국 사회의 공론장과 민주주의에 대한 의견 및 향후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의제를 폭넓게 물었다.
■“한국 사회 근본부터 성찰해야”
사회적으로 테두리 지어지지 않는
특고·청년 등 ‘삶의 붕괴’에 대해선
대변되는 이야기도, 대책도 없어
코로나19 사태는 노동, 교육 방식부터 사람들 사이 관계 맺음, 사회의 작동 구조까지 바꿔놓고 있다. 인터뷰에 응답한 이들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엔 사회 계약을 ‘새로 쓰는 수준’의 거시적 고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신경아 한림대 교수는 “주거, 교육, 생계 등 여러가지 면에서, 어떤 방향에서든 삶에 대한 공격이 올 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며 “위험사회에서 살아가는 시민으로서 위험요소를 줄이고 삶을 안정화시킬 수 있는 큰 비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이대승 불평등과시민성연구소장은 “시위를 막기 위해 세워진 광화문 차벽, 방역과정의 인권침해 등 익숙하지 않은 ‘예외상태’에서 벌어진 문제를 어떤 틀로 다룰지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창은 중앙대 교수는 “성장중심주의, 소비중심주의로 자연을 착취하는 관행을 유지한다면 감염병의 시대는 언제든 다시 도래한다”며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생명 감수성에 따라 새롭게 사유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특히 포스트 코로나 국면에서 ‘목소리가 없는 사람들’에게 더 주목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생업에 바쁘고 자신을 대변할 정당·직능단체가 없어 홀로 불합리함을 감당해야 하는 ‘6411번 버스’ 사람들은 코로나 시대에 한층 취약하다. 전문가들이 꼽은 대표적인 이들은 청소업, 미용업 등 비조직 취약노동자군과 노인, 실업청년, 이주노동자 등이었다.
양승훈 경남대 교수는 ‘평범한 다수’의 목소리가 배제되고 있다고 봤다. 그는 “지방대생, 중소기업 취업자, 지방 거주 여성 등 기성 언론에서 대변되지 않는 목소리들이 많다”며 “(과대대표되는 집단 외의 이들은) 신문에 사건·사고나 산재 때만 드러나는 현실”이라고 말했다. 엄기호 사회학자는 “세신사, 특수고용직 등 사회적으로 ‘뭉뚱그려지지 않는’ 사람의 삶의 붕괴에 대해선 대책, 이야기가 없다”며 “그들을 적극적으로 공론장에서 대변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코로나19가 가져온 문제들이 ‘완전히 새로운 것’도 아니다.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는 “차별, 혐오, 불평등 등을 비롯해 장애인·노인을 시설에 수용하는, 기존엔 당연하게 여겨져온 관행 등에 대해서도 재고와 반성이 요청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남재일 경북대 교수는 “비포(Before) 코로나에 대한 더 많은 성찰, 논의를 통해 포스트 코로나를 고민해야지, 새로운 곳에 답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코로나19를 겪으면서 현재를 외부적으로 관찰하는 기회가 생겼는데 이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임에도 비대면으로 대체될 수 없는 돌봄, 의료, 택배 등 필수노동의 가치도 재평가되고 있다. 권김현영 여성학자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논하기 위해서는 돌봄노동, 배달노동 등 필수노동자 의제를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안효상 기본소득네트워크 상임이사는 돌봄 노동과 ‘의료 공공성 문제’를 연결하면서 “겉으로는 별문제 없어보이나 밑으로 곪고 있는, 누군가의 희생에서 유지되는 것들이 피로도가 높아지면 터져나올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소득 재분배, 경제 민주화 등 코로나19 이후 한층 심화할 양극화에 대비할 필요성도 제기됐다. 금현섭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뉴노멀로서의 저성장에 대한 우려가 현실화,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한석호 전태일재단 활동가는 “상위 10%는 소득이 느는데, 하위 50%는 정체되거나 축소되는 등 코로나 위기가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편’으로 갈라진 공론장의 희생자는
SNS·유튜브 등 ‘공론장 과잉’이지만
평범한 다수의 목소리는 통로서 막혀
지금이 ‘사회적 계약’ 새로 써야 할 때
힘든 사람들은 있는데 그들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목소리가 공론장으로 통할 ‘통로’가 막혀있기 때문이다. ‘공론장의 과잉’이라고 할 만큼 많은 이야기가 쏟아지지만 정작 정책 등에 절박한 이들의 목소리는 잘 녹아들지 못한다.
많은 시민들이 정치·사회·경제 이슈를 습득하는 장이 된 유튜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 인터넷 공론장은 ‘내 편·네 편이 확연히 갈라진 운동장’이 된 지 오래다. 전문가들은 SNS나 시사·정치 유튜브 등에서의 편향이 심각하다고 지적하면서 그 책임은 현재 공론장의 작동 방식이나 적절한 의제를 제시·선도해야 할 책무가 있는 기성 언론과 정치권에 있다고 지적했다.
박태주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인터넷 공론장의 과격화는) 사회적 갈등이 분출되고 수렴, 논의되는 장이 없는 탓에 갈등이 개인화되면서 주목받으려는 노력이 그렇게 표현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 ‘갈등의 사회화’ 과정을 겪지 못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은 “SNS 등에서 과격한 의견이 다수는 아닐 텐데 언론과 온라인에 과대 소개, 평가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이는) 공론장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남재일 경북대 교수는 “현재 공론장이 정파적으로 선명한 양극화, 분단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른바 ‘관절 없는 사회’ ”라며 “ ‘선명한’ 사람끼리 파벌을 짓고 싸우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회색분자가 돼 공론장을 나가버린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공론장엔 다툼밖에 남지 않는다.
삶과 밀접하게 연관된 의제에 대한 이야기가 공론장에 적은 점도 문제로 지목됐다. 김공회 경상대 교수는 “공론장에 의제가 너무 많은 것보다도, 실제 자신의 삶과 밀접한 의제가 없는 게 문제”라며 “지방 청년들은 지방 청년 실업률은 모르면서도 자기와 관계 없는 이슈들에 폭발하는 상황이다. 시민의 삶을 아우르는 사회경제적 상황과 관계된 의제들이 많이 올라와야 한다”고 말했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은 “삶의 질과 직장 민주주의가 개선되지 않으면 진전됐던 정치적 민주주의마저 후퇴할 가능성이 있다”며 삶에 밀착한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세를 결집하기 좋은 이슈, 자극적인 언사만 부각되는 상황도 문제다. 진영의 입장이 첨예하게 갈리는 상황 탓에 다루기 복잡한 사안들은 중요한 의제라도 아예 뒤로 밀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구정우 성균관대 교수는 “여러 집단이 머리를 맞대 의견을 교환하고 합리적 해결책을 만들어가는 협치 과정들이 굉장히 약해졌다”고 지적했다. 김태일 영남대 교수는 ‘교육 문제’를 예로 들면서 “국민 전체가 이해 관계자이며 문제의 구조가 복잡하다. 해결에 중장기적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의제 우선순위에서 계속 뒤로 밀리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기본소득이나 전국민고용보험 등도 마찬가지다. 복지 혹은 노동·생산·분배 체계의 근본적 변화 대신 손쉽게 ‘눈에 보이는’ 대안만 가져오려다보니 정작 문제의 핵심이 되는 논의는 지지부진하고 의미 없는 단어만 공론장에 오간다.
정형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공공의료위원장은 “사회의 지속 가능성과 유지 차원에서 복지국가의 재분배 모델들이 큰 그림에서 설정돼야 하는데 이념, 어젠다 방향 자체가 뚜렷하지 않아 (의미가) 혼란스럽고 허황된 상황”이라며 “포괄적 복지국가로의 담론적 합의와 공공의료 강화 등의 논의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지원·윤승민·조문희 기자 deepdeep@kyunghyang.com
특별취재팀
백승찬·조문희(이상 사회부) 기자
윤승민(경제부)·김지원(산업부) 기자
도움주신 분들(가나다순·총 62명)
강원택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 고정갑희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집행위원장, 구인회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 권김현영 여성학자, 권수현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대표, 금현섭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김공회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 김도현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 김영민 청년유니온 사무처장,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김태일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남재일 경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박권일 사회비평가,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 박이대승 불평등과시민성연구소장,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 박태주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선임연구위원,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책임연구원, 서재철 녹색연합 전문위원,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 송기호 변호사,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신영전 한양대 의과대학 교수, 안효상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상임이사,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양홍석 변호사, 엄기호 사회학자,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 오창은 중앙대 다빈치교양대학 교수, 이가현 관악구 노동복지센터 조직팀장, 이관후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이광석 서울과기대 IT정책전문대학원 교수, 이원재 Lab2050 대표, 이일 변호사,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이지언 환경운동연합 활동가, 임지봉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위원,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전강수 대구가톨릭대 경제금융부동산학과 교수,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 정소연 SF작가, 정형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공공의료위원장, 조광희 변호사, 조영관 변호사, 조주현 계명대 여성학과 교수, 조형근 사회학자, 주병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차현진 한국은행 연구조정역,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장, 하준경 한양대 응용경제학과 교수, 하헌기 새로운소통연구소장, 한석호 전태일재단 활동가, 한숭희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 한지원 사회진보연대 부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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