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의대생, 학생운동가, 장관 거쳐 두 차례 대통령 “헌법 고쳐 교육 동등권 실현”…브라질 호세프·아르헨티나 페르난데스와 함께 남미의 세 여성 대통령 ‘주목’
장군의 딸, 의대생, 학생운동가, 보건장관, 국방장관, 대통령, 그리고 유엔 여성기구 총재.
많은 이력을 가진 미첼 바첼레트(62)의 이름 뒤엔 다시 칠레 대통령이라는 직함이 붙게 됐다. 중도좌파연합 ‘누에바 마요리아’(새로운 다수) 후보로 출마한 바첼레트는 지난 15일(현지시간) 치러진 대선 결선투표에서 중도우파 ‘알리안사’(동맹)의 에벨린 마테이 후보(60)를 따돌리고 다시 대통령궁에 입성하게 됐다.
바첼레트의 승리는 지난 3월 출마 선언 때부터 이미 점쳐졌다. 2010년 퇴임 당시 지지율이 80% 이상이었을 정도로 바첼레트의 인기는 높았다. 지난달 17일 치러진 1차 투표에서도 과반수에 조금 못 미치는 득표율(47%)을 기록했다. 게다가 경쟁상대였던 마테이에게는 ‘피노체트 독재정권 핵심 간부의 딸’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여러모로 예측이 가능했던 당선 과정보다 바첼레트가 살아온 삶, 그리고 그가 앞으로 이끌어 나갈 칠레의 미래가 더 주목받는 것은 그 때문이다.
피노체트, 그리고 칠레의 과거
1951년 바첼레트는 공군 장교 알베르토 바첼레트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장군의 자리까지 오른 아버지는 1972년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의 지명을 받아 칠레 물가조절위원회(JAP)를 총괄하는 요직을 맡기도 했다. 명문 고등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자랑하던 바첼레트는 “고통받는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며 1970년 칠레대학교에서 의학도의 길에 들어섰다.
모든 상황은 1973년 9월11일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일으킨 군사 쿠데타 이후 바뀌고 말았다. 쿠데타에 협력하지 않았던 아버지는 세 차례 체포돼 모진 고문을 받았다. 공군 장군이었다가 졸지에 사관생도들에게 고문을 당하게 된 아버지는 “인간 존재는 언제나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왔는데, 내 제자들이 나를 개처럼 다루고 있다”고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썼다. 그는 결국 이듬해 고문 후유증으로 숨졌다.
아버지가 사망한 이듬해 바첼레트도 어머니와 함께 수감생활을 하게 된다. 바첼레트 모녀는 지하활동을 하던 사회주의 정당에서 특사 역할을 맡기도 했다. 바첼레트는 칠레 정보국의 심문을 받으며, 다른 수감자들의 전기고문을 지켜본 뒤 국외로 추방됐다. 이후 호주와 동독을 전전하다 1979년 입국 허가가 떨어질 때까지 칠레 땅을 밟지 못했다. 귀국하고도 한동안은 학업에 열중하고 의사로 일했을 뿐 정치 전면에 나서진 못했다.
피노체트에게 아버지를 잃고 직접 고문까지 당했던 바첼레트만큼은 아닐지라도, 많은 칠레 국민들이 피노체트 정권의 피해자다. 집권기에는 독재를, 권좌에서 물러난 뒤에도 처벌을 피해 천수를 누리다 숨진 피노체트는 지금까지도 국민들의 공분을 일으키고 있다. 군부의 권한을 강화하고 군인과 경찰에게 임명직 상원의석을 할당하는 등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조항들을 1980년 헌법에 포함시킨 것도 피노체트였다. 그중 일부가 개헌됐지만 칠레 헌법엔 독재 시기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
내년 3월 집권하는 바첼레트는 헌법 개정에 본격 나선다. 민주국가에 맞는 새 헌법을 만들어 복지국가의 이상을 명시하고 국민 권리를 강조하고자 한다. 교육 문제 등 현재 칠레가 겪고 있는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헌법 개정은 곧 피노체트의 흔적과 칠레의 아픈 과거를 고쳐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피녜라, 그리고 칠레의 현재
현 대통령 세바스티안 피녜라(64)는 피노체트가 권좌에서 물러난 뒤 20년간 칠레를 통치하던 좌파 정권의 연속성을 끊은 인물이다. 피녜라는 바첼레트와 뗄 수 없는 인연을 맺고 있다. 2006년 바첼레트가 칠레 역사상 첫 여성 대통령에 올랐을 때 결선투표에서 패한 후보가 피녜라였기 때문이다. 2010년 재수 끝에 집권한 피녜라는 다시 이번에 바첼레트에게 정권을 내주게 됐다. 이로써 피녜라는 바첼레트의 후임이자 전임 대통령으로 기록되게 됐다.
피녜라가 걸어온 길은 바첼레트와 대조적이다. 그는 피노체트가 쿠데타로 집권하기 2년 전인 1971년, 바첼레트의 모교인 칠레대학교의 경제학 교수로 임용됐다. 바첼레트가 독재정권의 탄압에 시달리고 망명자로 떠도는 사이 피녜라는 계속 대학 강단에 섰다. 이후 방송사 회장이자 억만장자로, 정치권에서는 국민혁신당(RN) 대표로 승승장구했다. 서로 다른 인생의 경로만큼이나 두 사람의 정치노선은 다르다. 무상보육·무상교육을 내세운 바첼레트와 달리 피녜라는 주류 경제학에서 금과옥조로 여기는 ‘효율’을 철저히 정책의 중심으로 삼았다. 경제 부문의 지표는 분명 좋아졌다. 국내총생산(GDP)은 매년 6%씩 늘었고, 피녜라가 집권한 2010년 처음으로 2000억달러(약 210조원)를 넘었다.
그러나 시장과 효율성만을 최우선시한 것은 피녜라의 큰 실수였다. 3년 가까이 이어져온 학생 시위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2011년 대학생들이 교육 불평등 개선과 공립대학에 대한 국가 지원 등을 요구했지만 피녜라는 교육경쟁력을 높인다며 되레 대학의 수익 사업을 합법화하는 등 공교육을 무력화시켰다. 학생들과 정부의 입장이 평행선을 달리며 시위가 장기화했다. 그 와중에 체포된 학생이 1800명이 넘었다.
칠레에서 교육 불평등은 정권을 뒤흔들 수 있는 민감한 사안이다. 공교육에 대한 지원이 부족해, 바첼레트의 첫 집권 때에도 대규모 학생 시위가 두 차례나 일어났다. 특히 집권 첫해인 2006년 ‘펭귄 혁명’이라 불리던 시위가 일어나 바첼레트의 정치적 고비로 거론되기도 했다. 당시 바첼레트는 정치적 배경과 출신을 막론하고 각계각층 인사들을 소집해 위원회를 꾸려 의견을 모았고, 2009년의 교육개혁 법안이라는 결실을 남겼다. 바첼레트는 이번 대선에서는 당시의 결실에 더해 대학까지 무상교육을 확대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선일에도 “모두가 교육받을 권리를 동등하게 누릴 수 있도록 헌법을 고치겠다”고 말했다.
ABC, 그리고 칠레의 미래
바첼레트의 승리 소식과 함께 세계의 관심은 여성 대통령을 두게 된 남미의 ABC(아르헨티나-브라질-칠레)에 쏠렸다.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60)과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66), 바첼레트 세 명은 모두 중도좌파 성향으로 분류된다.
특히 브라질의 호세프는 바첼레트와 막역한 사이다. 두 사람 모두 남미 좌파운동의 산증인이다. 실용주의 좌파라는 정치적 노선과 높은 지지율, 싱글맘이라는 점도 닮았다. 독재정권에 맞서다 투옥과 고문 등의 고초를 겪었고, 다크호스로 떠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집권에 성공했고, 대통령이 된 뒤 오히려 진가를 발휘하며 높은 정치력을 선보였다는 것도 비슷하다. 굳이 스타일의 차이를 꼽자면 바첼레트는 다소 어눌하면서 ‘포용’의 이미지가 강한 반면, 호세프는 뚝심과 강골이 돋보인다.
하지만 남미 내에서 브라질과 칠레의 협력관계는 다소 미흡했다. 브라질은 메르코수르(남미공동시장)의 주축인 반면, 칠레는 2012년 멕시코·콜롬비아·페루와 함께 ‘태평양동맹’을 결성해 무역관계를 강화해왔다. 바첼레트와 호세프 사이의 친화력이 두 나라의 협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지 주목된다.
아르헨티나의 페르난데스는 스타일과 행보에서 바첼레트, 호세프와는 확연히 다르다. 하지만 대학시절부터 학생운동에 적극 참가했다는 점, 군부정권이 끝난 뒤 정계에 뛰어들어 좌파 정치인으로 성장한 점 등은 비슷하다. 페르난데스 집권 초기에는 전임자인 남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의 후광 덕에 대통령이 됐다는 비아냥도 많았지만 2011년 재선 뒤 2기를 거치며 정치적 독립에 성공했다는 평을 듣는다.
아직 메르코수르 국가들은 역내 교역보다는 미국·유럽 등과의 교역량이 더 많아 공동체로서의 기능이 크지 않다. 정책적 통일성도 부족한, 느슨한 연합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ABC에서 동질감 있는 실용주의 좌파 세력이 동시에 집권함으로써 역내 협력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다. ABC 모두 과거의 상처를 씻는 과정을 밟고 있으며, 미래를 향해 손을 잡고 나가야 하는 과제를 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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