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복면 쓴 지지자들 “원주민 투쟁 세계에 큰 울림”
멕시코 남동부 치아파스주 산크리스토발 데 라스카사스의 시청 난간에는 총탄에 뚫린 구멍이 남아 있다. 20년 전, 원주민들의 권리를 주장하며 들고 일어선 농민 게릴라들이 정부군과 교전하는 과정에서 생긴 총탄 자국이다.
멕시코에서 1월1일은 조금 특별하다. 1월1일은 캐나다, 미국과 함께 체결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발효된 날이다. 20년 전인 1994년 1월1일 멕시코가 북쪽 두 나라와의 무역장벽을 허물기로 했을 때, 멕시코를 허물 듯한 기세로 일어난 이들도 있었다.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이었다.
사파티스타의 투쟁선언 2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1일 산크리스토발에서 열렸다. 멕시코뿐 아니라 미국, 유럽 등에서까지 찾아온 지지자 2000여명이 사파티스타 부사령관 마르코스의 상징과 같은 검은 복면을 쓰고 모였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 우리는 바보였고, 여론조작에 넘어갔고, 통제당했고, 잊혀졌다. 우리는 무지와 빈곤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20년 전 우리는 일어섰다.” 사파티스타 사령관 호르텐시아가 연단에서 외치자 세계에서 모인 지지자들이 환호했다고 현지 언론 라호르나다 등은 전했다. 워싱턴포스트, BBC방송, 알자지라방송 등 세계 언론들은 사파티스타 투쟁의 역사와 의미를 조망하는 보도들을 내놨다.
▲ 원주민 권리 외치다 반세계화·반신자유주의 운동 중심으로
‘마르코스 코뮈니케’ 각국 전파… 인터넷·모바일 적극 활용
1910년대 멕시코 혁명지도자 에밀리아노 사파타의 이름을 딴 사파티스타는 1983년 12월 창설됐다. 봉기에 주로 가담한 것은 역사적으로 차별받고 정치적, 경제적으로도 권리를 빼앗긴 원주민들이었다. 3000여명이 치아파스주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며 시작된 사파티스타의 싸움은 2003년 치아파스 일부 지역을 원주민 자치지역으로 인정받는 성과로 이어졌다. 정부와의 수차례 교전과 휴전협상을 통해 치아파스의 사파티스타 장악 지역은 ‘원주민들의 고향이자 무정부주의자들의 해방구’로 공인받았다.
사회주의와 비슷하지만 원주민들의 권리와 자치에 중점을 둔 사파티스타의 사상, 특히 ‘부사령관’이라고만 불렸던 마르코스의 코뮈니케(선언서)들은 멕시코뿐 아니라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원주민 권리투쟁으로 시작된 사파티스타의 싸움은 원주민들을 계속 ‘자본주의의 식민지배’ 아래로 밀어넣는 글로벌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시스템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2005년 6월 마르코스가 발표한 ‘라카돈 정글 6차 선언문’은 세계를 휩쓴 반신자유주의·반세계화의 흐름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늘 복면차림을 한 마르코스는 ‘얼굴없는 지도자’이자 반세계화 진영의 스타로 부상했다. 마르코스를 곁에서 본 저널리스트들은 “소총과 탄띠를 멘 마르코스의 곁에는 항상 노트북이 있다”고 전한다.
사파티스타는 게릴라전과 대규모 행진 같은 ‘고전적인’ 남미 좌파들의 투쟁방식에 더해 인터넷과 모바일 통신 등 신기술을 적극 활용, 영향력을 세계로 확산시켰다.
20년이 흘렀지만 사파티스타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사파티스타는 엔리케 페냐 니에토 대통령이 멕시코의 석유개발권을 외국 자본에 개방하려는 것에 꾸준히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다. 마르코스는 페냐 니에토 대통령이 지난달 20일 에너지개혁법안에 서명하자 “국민들에 대한 배신”이라며 “그동안 벌어진 ‘개혁을 가장한 교묘한 약탈’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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