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대지진이 발생하자, 아이티인들이 대규모로 국경을 넘었다. 도미니카공화국은 지진 피해 초기부터 식량과 약품을 아이티에 지원했다. 그러나 도미니카인들은 점차 아이티인들을 반기지 않게 됐다.
중미의 소국 아이티에는 주변국과 다른 특이한 점들이 많다. 15세기 이후 ‘대항해시대’가 열리며 유럽 국가들의 표적이 된 중남미는 절반(브라질)이 포르투갈어를, 나머지 절반이 스페인어를 주로 구사한다.
17세기 후반부터 프랑스가 지배하기 시작한 아이티는 중남미에서는 드물게 프랑스어가 공용어인 국가다. 이는 아이티 국민의 출신과도 관련이 있다.
원주민과 ‘정복자’ 유럽인, 그들의 혼혈 후손으로 구성된 다른 나라와 달리, 아이티 국민의 조상은 대부분 아프리카계다. 아이티 전체 국민의 95%가 흑인인데, 흑인 노예들의 정거장이라는 아이티의 슬픈 역사 때문이다.
아이티라는 나라를 최근 몇 년 새 전 세계에 알린 것 역시 안타깝게도 아이티의 슬픈 역사로 기록될 사건이었다. 2010년 1월 12일 오후 5시쯤, 아이티 전역에 발생한 진도 7.0의 대지진이었다. 24일까지 진도 4.5 이상의 여진만 50여차례 발생했고, 최소 10만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2010년 대지진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아이티 난민들이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서 화재로 폐허가 된 난민 캠프 한가운데에 서 있다. 포르토프랭스/AP연합뉴스
투생 루베르튀르 국제공항 관제탑과 포르토프랭스 항구 등 주요 국가 기반시설이 파괴됐다. 유엔을 비롯한 전 세계가 아이티에 구호의 손길을 건넸고, 한국 단비부대를 비롯한 유엔 평화유지군과 많은 구호단체에서 아이티 재건에 힘을 보태고 있다.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아이티 사람들이 겪는 삶의 어려움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 1200달러(약 127만원)에 불과한 아이티의 1인당 연간 국내총생산(GDP)은 중남미 국가 중 가장 낮다. 원래 경제적으로 빈곤했던 아이티에 큰 재난이 겹치니 삶이 어려워지는 것은 당연했다.
아이티 현지에서 구호활동을 벌이고 있는 한 구호단체 관계자는 “아이티의 기반시설이 파괴돼 물가도 올랐다”며 “공산품은 미국에서보다 50% 이상 높은 가격을 받고 판매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공항이나 항구 등 운송통로가 완전히 복구되지 않아 대부분의 수입상품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도미니카공화국을 거치며 물가가 오르게 된 것이다. 이 관계자는 “아이티에서 일하는 구호단체 근무자들이 아이티의 비싼 물가 때문에 국외에서 생필품을 대량구매해 입국하는 경우도 많다”고 덧붙였다.
두 나라 1인당 GDP 8배나 차이
반면 이스파뇰라섬을 동·서로 나눠 쓰고 있는 이웃 도미니카공화국의 사정은 조금 다르다. 관계자는 “폐허가 된 아이티와는 달리, 도미니카공화국 수도 산토도밍고에 가면 미국의 소도시에 온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실제 도미니카공화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아이티의 8배에 가까운 9500달러다. 도미니카를 거치며 아이티에 들어오는 수입품 가격이 오른 만큼, 도미니카는 자연스레 ‘중개무역 수입’이라는 반사이익까지 얻었다.
남한 면적의 80% 정도 크기의 이스파뇰라섬(7만5880㎢)을 동·서로 공유하는 이 두 나라 사이엔 경제력 차이만큼이나 작지 않은 틈이 있다. 이 틈은 유럽 국가들이 신대륙을 발견했을 때부터 생겼다.
1697년 네덜란드 레이스베이크 조약을 통해 프랑스와 스페인이 이스파뇰라섬의 통치권을 반반씩 나눠 갖게 됐다. 유럽 대륙에서 프랑스와 스페인이 벌인 9년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한 조약이었는데, 이 때문에 언어가 서로 다른 두 나라가 생기게 된 것이다.
아이티는 1805년 중남미 최초의 독립국이 된 뒤, 1822년 장 피에르 보이어를 앞세워 도미니카를 지배하기도 했다. 반면 도미니카는 스페인-아이티-미국의 지배를 받다 1924년에야 독립했다. 그러던 1934년, 도미니카의 독재자 라파엘 트루히요가 국내 결집을 도모할 요량으로 반아이티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 때문에 도미니카 영토에 살고 있던 아이티인 1만여명이 도미니카 군대에 목숨을 잃었다. 아이티와 도미니카 사이의 국경이 정해진 것도 트루히요 집권기다.
독립은 빨랐지만 아이티의 경제성장은 더뎠다. 아이티인들의 도미니카 유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그 때문이다. 1920년대 도미니카에 설탕산업이 번성하자, 아이티인들이 도미니카에 일자리를 얻으려 몰려들었다.
플랜테이션 농장부터 가정의 가사노동일까지 아이티인들이 점차 도미니카에서 일자리를 잡았다. 이 현상으로 양국의 경제에 모두 도움이 됐다는 평가도 있지만, 한편에선 일자리를 잃게 된 도미니카인들이 아이티에 대해 느끼는 반감이 커지기도 했다.
도미니카 거주 아이티인 추방 명령
2010년 대지진이 발생하자, 지진으로 피해를 본 아이티인들이 대규모로 국경을 넘었다. 도미니카공화국은 지진피해 초기부터 식량과 약품을 아이티에 지원했고, 아이티에서 발생한 부상자들에게 의료시설을 제공하며 호의를 베풀었다.
그러나 도미니카인들은 점차 아이티인들을 반기지 않게 됐다. 아이티인들이 들어온 이후 범죄가 늘고 콜레라가 퍼졌다는 것이 도미니카인들의 주장이다.
그런 와중에 도미니카공화국은 지난해 9월, 헌법재판소에서 논란을 일으킬 결정을 발표한다. 그동안 도미니카에서 태어난 외국인들에게는 자동적으로 시민권이 부여됐었는데, 1929년 이후 도미니카로 넘어온 외국인이나 그 자녀들이 받은 시민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아이티인들을 겨냥하고 제정된 것이라는 게 명백해지면서 논란이 있었다. 도미니카공화국 정부는 이 결정으로 영향을 받을 아이티인들이 2만4000명이라고 했지만, 인권단체들은 아이티인 20만명이 시민권을 잃게 된다고 주장했다.
도미니카공화국의 이민정책에 대한 논란은 11월 들어 더욱 커졌다. 도미니카공화국 정부가 아예 자국 내 아이티인들에게 추방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아이티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마을에서 도미니카 커플에게 일어난 살인사건이 있은 지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당시 사건이 아이티인들에 의한 범행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도미니카공화국 정부는 자국에 살던 아이티인들 수백명을 추방했다. 결국 인권단체들뿐 아니라 카리브해의 주변국들, 유엔까지 나서 도미니카공화국의 조치를 비난했고, 양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당국자간 회담을 진행하고 있다.
도미니카에서 다시 돌아오고 있는 아이티인들에게는 지금 살 곳도, 일할 곳도 부족한 상황이다. 일을 한다고 해서 충분한 몫을 받는 것도 아니다. 현지 구호단체 관계자는 “현재 아이티 노동자의 평균 월수입이 150달러 수준이며, 그 중 생활비와 교통비를 빼면 남는 몫은 25달러 정도”라고 전했다.
그렇다고 바닷길이 열려 있는 것도 아니다. 지난해 11월과 12월, 아이티를 탈출하던 보트가 뒤집어져 아이티인 약 50명이 카리브해에서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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