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임 펀드 1611억원 투자자에 돌려줘라” 권고… 금융사는 반발[주간경향]

“‘투자원금 전액 반환’ 결정이라는 지금까지 가보지 않았던 오늘의 이 길이 금융산업 신뢰회복을 향한 지름길이 되기를 바랍니다.”

윤석헌 금융감독원장이 지난 7월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회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해 생각에 잠겨 있다. / 연합뉴스


정성웅 금융감독원 부원장보는 지난 7월 1일 ‘라임 무역금융펀드 분쟁조정 브리핑’에서 이렇게 말했다. 금감원 분쟁조정위원회(분조위)는 라임자산운용(라임)이 운용하다 환매 중단된 무역금융펀드 중 2018년 11월 이후 판매분인 1611억원 어치는 계약 과정에 문제가 있어 투자자에게 전액 반환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국내 금융상품 분쟁조정 역사에서 판매사가 투자자에게 원금 전액을 돌려주라는 권고가 나온 것은 없었다. 말 그대로 ‘가지 않은 길’이었다.

판매사들의 답은 ‘당장 결정할 수 없으니 더 고민할 시간을 달라’는 것이었다. 결정 시한은 한 달 더 미뤄졌다. 과거 금감원의 분조위 권고안이 나오면 금융사들이 이를 받아들여 투자자들과 조정을 시작했던 것과 다른 풍경이다. 금감원의 ‘가지 않은 길’이 순탄치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금융소비자 보호’라는 정체성은 뚜렷하게 유지하고 있지만, 금융사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은 탓이다.

‘라임 사태’는 총 1조6000억원이 넘는 규모의 라임 펀드가 환매 중단된 사건이다. 운용사 라임이 펀드 운용 과정에서 각종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는 혐의가 금감원 검사 등으로 드러났는데, 금감원은 일단 은행·증권 등 라임 펀드 판매사가 피해 투자자들에게 일정액을 배상하도록 분조위를 개최했다.

‘키코 사태’에서 본격화된 금융사의 반기



분쟁조정 절차는 보통 손실 규모가 확정돼야 시작되지만, 금감원은 라임의 4개 모(母)펀드 중 ‘무역금융펀드’ 투자원금이 사실상 100% 손실됐다고 보고 분쟁조정 절차를 밟았다. 분조위는 분쟁조정 사상 처음 ‘원금 100% 반환’이라는 권고안을 냈다. 금감원 검사결과, 무역금융펀드 판매사이자 라임의 무역금융펀드 운용 때 자금을 댔던 신한금융투자는 2018년 11월, 라임이 펀드 투자원금으로 투자했던 해외펀드에 문제가 생겼음을 발견했다. 판매사가 상품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안 이후에도 투자자에게 수익이 난다며 판매한 것은 민법상 ‘중요한 부분에 착오가 있으면 계약을 취소할 수 있다’는 내용에 부합한다고 보고 금감원은 100% 반환 결정을 내렸다.

환매 중단된 라임 펀드 중 무역금융펀드 판매액은 2438억원, 100% 반환 대상이 된 ‘2018년 11월 이후 판매분’은 1611억원이다. 은행·증권사에 아주 큰 부담이 되는 액수라는 평가가 많았지만, 이들은 7월 27일로 예정됐던 권고안 수용 시한을 한 달 정도 미뤄달라고 금감원에 요청했다. 금감원도 일단 권고안 수용 결정 연기를 받아들였다. 금융상품 판매사와 소비자 간 분쟁을 조정하는 분조위 결정은 권고사항일 뿐 구속력은 없다. 재판상 화해의 효력을 갖는 건 양측이 모두 권고안을 받아들였을 때다. 판매사가 수용하지 않거나 수용 여부를 미룰 때 이를 강제할 규정은 없다.

그간 금융사는 대부분 금감원의 분쟁조정 권고안을 수용해왔다. 그러나 금감원이 전보다 금융사들에 더 많은 책임을 물으면서 은행들은 전과 달리 권고안 수용 결정을 미루거나 수용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있다.


또 다른 사례는 금감원 분조위가 지난해 12월 13일 발표한 외환파생상품 ‘키코(KIKO) 사태’ 분쟁조정 권고안이다. 키코는 환율이 급등할 때 달러 투자금을 대거 잃을 수 있는 구조의 상품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전례 없이 환율이 급등하는 바람에 키코에 투자했던 약 900개 기업이 손실을 본 ‘키코 사태’가 벌어졌다. 기업들은 은행이 키코를 판매하면서 위험성을 설명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분조위는 “판매사들이 기업들의 손실액 중 15~41%를 배상해야 한다”는 권고안을 냈다. 배상액수는 150억원(신한은행)이 최고액일 정도로 크지 않았지만 분쟁조정 권고안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파격’이었다. 2008년 발생한 키코 사태에 대한 분조위 권고안은 11년이 지난 후에 나왔다. 민법상 손해배상 청구권 시효는 10년이 넘었는데 배상이 가능하냐는 게 판매사 입장이다.

금감원은 2018년 5월 “키코 피해와 관련해 법원 판결을 받지 않은 기업은 분쟁조정을 신청할 수 있다”고 피해 기업들에 전달했고, 피해 기업 4곳이 그해 7월 분쟁조정을 신청하면서 절차에 착수해 결론까지 냈다. 그러나 분쟁조정 당사자인 6개 은행 중 우리은행만이 한 차례 결정 연기 이후 권고안 수용 의사를 밝혔다. 신한·하나·대구은행은 ‘코로나19’라는 명분까지 더해 무려 5차례나 수용 결정 시한을 연장해달라고 요청했다.

미뤄진 ‘라임 권고안’ 수용 시한



윤석헌 원장이 2018년 5월 취임한 이후 금감원은 ‘금융소비자 보호’ 기조를 분명하게 강조했다. 키코 재조사 및 배상도 그가 금감원장 취임 전 재직했던 ‘금융행정혁신위원회’가 2017년 12월 권고한 사항이기도 하다. 그간 금융사나 당국이 ‘소비자 보호’에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기울였다는 데서는 금감원의 최근 행보는 의미 있다.

다만 금융사가 금감원 결정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고 ‘반기’를 드는 모양새가 뚜렷해졌다. 금융사는 ‘100% 보상’이나 ‘10여 년 전 사건 배상’ 같은 사례가 전례로 남는 것이 향후 이어질 금융 분쟁조정에서 불리할 수 있다며 버티고 있다. 금융사들은 전에 없던 배상이 향후 금융소비자들의 도덕적 해이를 부추길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금융상품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정보도 많은 금융사가 복잡한 금융상품을 팔아오면서 그간 충분한 책임을 지지 않았다는 비판 여론도 만만치 않다.

금감원은 키코 권고안과 달리 라임 무역금융펀드 권고안은 판매사들이 추가로 결정 시한을 연장하게 놔두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결정 시한인 8월 말에 판매사들이 어떤 입장을 취하고, 금감원이 어떤 결론을 유도하느냐에 따라 지금의 갈등 구도에 변화가 생길지, 더 심화될지가 판가름 날 것으로 보인다.

익명을 요구한 한 금융 전문가는 “분쟁조정은 피해자와 소비자가 법적 다툼까지 가지 않고 일찍이 문제를 해결하자는 취지로 하는 절차인데, 금융사들이 결정을 미루면서 취지가 퇴색되고 있다”며 “판매사들의 전향적인 결정도 중요하지만, 금감원도 피해자들과 판매사가 납득할 수 있도록 충분한 설명을 하며 문제를 해결해가야 한다”고 말했다.

Posted by 윤승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