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스 판 데어 뤼흐트 신부의 생전 모습 (로이터통신)
ㆍ포격 계속되는 홈스 수도원에 남아 난민들 보호
ㆍ“종교보다 인권” 기독교·무슬림 가리지 않고 도와
ㆍ반정부군 내 극단주의 소행 추정… 곳곳 애도 물결
지난 2월 시리아 내전의 주요 격전지인 홈스에 갇혔던 난민 약 1500명이 유엔과 적신월사의 보호 속에 대피했다. 그때 일부 난민들을 자신의 수도원에서 보호해온 네덜란드 출신의 예수회 신부 프란스 판 데어 뤼흐트(75)는 홈스에 남기로 결정했다. 그는 당시 “시리아인들은 그들이 가진 많은 것들을 내게 주었다”며 “그들이 고통받는다면, 나는 함께 그 어려움을 나누고 싶다”고 AFP통신에 말했다.
그로부터 두 달 만에 프란스 신부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영국 시리아인권관측소는 7일 프란스 신부가 수도원을 습격한 괴한이 쏜 총 두 발을 맞아 숨졌다고 밝혔다. 살해 주체와 의도는 파악되지 않았지만, 알누스라전선 등 반정부군 내 극단주의 세력의 소행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프란스 신부는 지난 1월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에 홈스의 상황을 알려 주목받기 시작했다. 유튜브 동영상을 통해 홈스 난민들이 배고픔에 괴로워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자신의 페이스북에는 “굶주림에 도덕이 사라졌다. 인간이 야생동물로 바뀌고 있다”고 묘사했다. 그런 그를 이코노미스트 등 서방 언론들이 주목하면서 프란스 신부의 이야기가 널리 알려졌다.
프란스 신부는 1964년부터 레바논에서 2년간 아랍어를 익힌 뒤 1966년부터 시리아에서 활동했다. 50년간 인도에서 혈혈단신 봉사에 나섰던 테레사 수녀처럼 프란스 신부도 약 50년간 홈스 인근에서 시리아인들을 도우며 살았다. 1980년부터는 홈스 외곽에서 공동체 농장을 운영했고, 심리치료를 배워 지역 젊은이들의 정신질환 치료를 도왔다. 내전 이후에는 난민들을 수도원에서 돌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2013년부터 본격화된 교전으로 홈스는 점차 폐허가 되었고 그를 돕던 직원들도 “이 상황에서는 난민들을 보호할 수 없다”며 떠났다. 하지만 프란스 신부는 홈스에 남았다.
홈스는 중동에서 보기 드물게 기독교인과 무슬림들이 공존해온 곳이다. 종교를 가리지 않는 프란스 신부의 행보도 홈스와 닮았다. 그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끼리의 대화를 주선하기도 했다. 그는 지난 2월 인터넷매체 릴리프웹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기독교냐, 이슬람교냐를 따지지 않고 인간 자체를 먼저 본다”고 말한 바 있다. 홈스에 사는 반정부 활동가 아미르 바데르는 “어떤 무장세력들도 신부를 적으로 여기지 않았다”면서 “광신도가 이번 일을 저질렀을 것”이라고 뉴욕타임스에 말했다. 또 다른 활동가는 이번 비극이 “(홈스에 있는) 반정부군에도 큰 혼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프란스 신부의 사망 소식에 애도가 이어졌다. 페데리코 롬바르디 교황청 대변인은 “평화의 사람이 숨을 거뒀다”고 밝혔다. 젠 사키 미국 국무부 대변인도 “홈스의 고통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일했다”며 프란스 신부를 기렸다. 평소 시리아를 ‘자신의 집’이라고 말한 프란스 신부는 소원대로 시리아에 묻힐 것이라고 네덜란드 예수회가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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