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츠버러 소년들' , 그리고, 이들을 변호했던 변호사 새뮤얼 레이보비츠 / 위키피디아



ㆍ영화·소설·뮤지컬로도 잘 알려진 인종차별 판결 ‘스코츠버러 사건’

ㆍ당시 피의자 9명 모두 누명 벗어

증거도 없이 흑인이라는 이유로 억울하게 성폭행 혐의를 받던 ‘스코츠버러 소년들’이 82년 만에 모두 누명을 벗었다.

미국 앨라배마주 석방위원회(ABPP)는 21일 ‘스코츠버러 사건’의 성폭행 피의자로 기소됐던 흑인 피의자 3명에게 만장일치로 사후 사면 결정을 내렸다. 이로써 타당한 증거 없이 피의자로 몰렸던 ‘스코츠버러 소년’ 9명은 모두 누명을 벗게 됐다.

‘스코츠버러 사건’은 흑인 소년 9명이 백인 여성 2명을 성폭행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사건이다. 소년 9명은 1931년 3월25일 앨라배마주를 지나던 기차 안에서 백인 남성들과 싸움을 벌이다 보안관들에게 붙잡혔다. 그런데 같이 있던 백인 여성 2명이 흑인 소년 9명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밝힌 것이다. 역사학자 댄 카터는 BBC에 “백인 여성 2명이 자신들이 매춘 혐의로 기소될까봐 옆에 있던 소년들을 기소한 것”이라며 “당시 제시된 증거를 지금 다시 연구해본다면 성폭행이 없었다는 결론이 나올 것”이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흑인 소년들 9명 가운데 8명에게 1심에서 사형을 선고했다. 사건이 벌어진 지 보름 뒤, 그리고 재판이 시작된 지 겨우 사흘 뒤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흑인 차별에 반대하는 움직임들이 일어났다. 민권운동가 로자 파크스의 전미유색인종지위향상협의회(NACCP)를 비롯한 시민단체들이 소년들을 변론하겠다고 발벗고 나섰다. 이들은 ‘스코츠버러 소년들’로 불리게 된 피고들이 법적인 도움을 전혀 받지 못했으며, 흑인 배심원이 참여할 수 없는 것은 위헌이라며 앨라배마주 대법원에 항소했다. 연방대법원과 주대법원을 오가면서 재판이 계속되자 재판부는 조금씩 변호인들의 문제 제기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결국 소년 9명 가운데 5명은 1937년 성폭행 혐의를 벗을 수 있었다. 1976년에는 클라렌스 노리스가 추가로 사면됐다. 하지만 나머지 3명은 1989년 노리스가 사망하기 이전에 누명을 풀지 못한 채 세상을 떴다.

결국 앨라배마주 상원의회가 올해 4월 사후 사면 결정권을 석방위원회에 부여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나머지 3명도 혐의를 벗을 수 있었다. 법안을 발의한 아서 오어 앨라배마주 상원의원(48)은 이번 사면에 대해 “후회하고 싶은 과거 사건 이후 우리가 어디까지 왔는지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워싱턴포스트에 전했다.

스코츠버러 사건은 미국 남부의 뿌리 깊은 인종차별이 부른 대표적인 비극으로 불린다. 당시 앨라배마주를 포함한 미국 남부지역의 인종차별은 심각했다. 면화 재배 등 흑인 노예를 통한 농업이 이 지역의 전통적인 산업이었기 때문이다. 백인 청중 수천명이 재판을 참관하는 가운데 치러진 재판에선 당연하게도 공정한 판결을 기대할 수 없었다. 제임스 애커 뉴욕주립대 올버니 교수는 그의 저서 <스코츠버러 사건의 유산>에서 “판사와 검사는 재판 당시 폭력 사태를 우려해 빠른 시간 내에 판결을 내리려 했다”며 “재판부는 주정부에도 변호인 제공 외엔 피의자들을 돕지 말라고 강요했다”고 썼다.

스코츠버러 소년들의 이야기는 소설과 음악, 영화를 통해 세간에 계속 알려졌다. 마지막 생존자 노리스는 성폭행 누명을 썼다가 사면되는 과정을 <스코츠버러의 소년들>이라는 책에 직접 쓰기도 했다. 하퍼 리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는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0년에는 스코츠버러 사건을 다룬 뮤지컬이 브로드웨이에서 상연됐고, 앨라배마주엔 스코츠버러 박물관이 세워지기도 했다.


Posted by 윤승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