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22일 케네디 서거 50주기… 세계 곳곳서 행사 줄이어


1963년 11월22일. 미국의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는 세 발의 총성에 고개를 떨궜다. 당시 케네디의 나이는 46세, 대통령에 취임한 지 1037일째였다. 4년 임기도 채우지 못한 케네디를 많은 사람들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

서거 50주기를 맞아 케네디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열기는 미국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뜨겁다. BBC, AFP통신 등 각종 언론매체들은 세계 각 대륙 사람들이 기억하는 케네디의 모습을 담아 보도했다. 이탈리아 정치인 발터 벨트로니(58)는 “케네디의 젊고 잘생긴 외모, 그리고 신선한 감각이 그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탔다”고 떠올렸다. 콜롬비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레이예스(67)는 케네디의 라틴 아메리카 원조 계획인 ‘발전을 위한 동맹’을 언급하며 “케네디 덕분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다는 데 기쁨을 느끼게 됐다”고 밝혔다.

딸과 함께 존 F 케네디가 미국 매사추세츠주 연방 상원의원이던 1960년 7월25일 히아니스 포트에서 아내 재클린의 품에 안겨 책을 읽는 딸 캐럴라인과 함께 앉아 있다. 히아니스 포트 | AP연합뉴스


▲ “당신은 국가를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취임연설 ‘명언’ 등 영국 전설 ‘카멜롯’ 연상
가족 일상 사진 공개 ‘이미지 만들기’ 힘도


인터넷에서도 추모 물결이 일고 있다. 미국 존 F 케네디 박물관은 케네디 서거 50주기 기념 홈페이지를 제작했다. 케네디의 업적을 보고 관련 영상이나 사진 등을 내려받을 수 있다. 케네디와 관련 없어 보이는 미국은퇴자협회(AARP)도 케네디 사망 당시의 기억들을 모은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지난 7월 이후 추모글 약 1700개가 실렸다. 11월 들어 20일까지 케네디를 뜻하는 트위터의 해시태그(#JFK) 숫자도 지난해 11월 한 달 동안보다 3배 가까이 늘었다.

사후 50년이 지났지만 왜 케네디는 ‘전설’로 남아 있을까. 우선 케네디가 한 말들 덕분이다. 1961년 취임연설 때 했던 “국가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할지 묻기 전에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찾으라”, 1962년 케네디가 독일 베를린 장벽 서쪽에서 독일어로 말한 “나는 베를린 사람입니다” 등은 당시에도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베를린에 사는 베르너 에커트(81)는 AF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그 말로 케네디는 베를린 사람들이 소련에 맞설 수 있도록 용기를 줬다”고 말했다. 이 말들이 케네디가 즉흥적으로 한 말인지, 보좌진이 사전에 써준 것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확실한 것은 사람들이 이 명언들 때문에 케네디를 현실과 다른 이미지로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하버드대 조지프 나이 석좌교수는 “케네디는 모든 결정을 신중하게 하는 사람이었지만, 그가 한 명언들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이상주의자로 기억하게 됐다”고 말했다.

케네디의 부인 재클린 케네디 덕분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가 케네디 가문을 영국 전설 ‘카멜롯’에 처음 빗댄 사람이기 때문이다. 재클린은 케네디 서거 일주일 뒤인 1963년 11월29일, 미국 잡지 라이프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잭(케네디의 애칭)은 뮤지컬 <카멜롯>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노래를 좋아했다”고 말했다. 

당시 재클린을 인터뷰한 언론인 시어도어 화이트는 “재클린은 케네디의 대통령 재임기간이 전설 속 카멜롯성의 영광과 비견되길 원했다”며 “재클린은 케네디가 역사 속에서 잊혀지지 않을까 염려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모든 사람들이 케네디의 죽음을 잊을까봐’ 총격 당시 옷에 묻은 피를 지우지 않았던 재클린의 바람처럼 케네디는 ‘카멜롯성에 사는 아서 왕’이 됐다. <카멜롯의 초상> <카멜롯 따라잡기> 등 ‘카멜롯’을 제목에 쓴 케네디 관련 서적들이 최근까지도 발간되고 있다.

케네디의 아버지인 조지프 케네디 시니어도 케네디 전설 만들기에 힘을 보탰다. 케네디 서거 50주년 사진전 ‘카멜롯 만들기’를 기획한 인디라 윌리엄스 바빅은 “그는 이미지의 힘을 매우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조지프 케네디는 1920년대에 할리우드에서 영화 스튜디오를 운영하기도 했다. 케네디를 연구한 역사가 리처드 리브스는 “케네디의 가족들은 아름답고, 젊고, 세련된 모습들만 보이려고 해 사진작가가 좋아하지 않았다”고 떠올렸다. 

케네디 자신도 이미지 유지를 위해 노력했다. 로버트 댈럭은 저서 <케네디 평전>에 “케네디는 건강한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 재임기간 중엔 주치의들을 만난 사실이 알려지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했다”면서도 “케네디는 자신의 건강 상태를 속였을 개연성도 없지 않다”고 언급했다. 동시에 케네디는 자신을 보는 대중에게 친근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썼다. 백악관 공식 사진작가인 피트 소우자는 “백악관에서 대통령과 가족들의 ‘자연스러운 일상’을 담기 시작한 것은 케네디의 집권 후부터”라고 했다. 리브스는 “케네디가 보여준 자연스러운 일상 때문에 대중은 케네디를 ‘보통 사람’으로 기억할 수 있었다”며 “그래서 모두가 케네디의 죽음을 자기가 당한 일처럼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CBS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케네디는 그렇게 전 세계인들에게 ‘큰 꿈을 품은 위대한 전설’이자 ‘언제나 미국인들과 가까운 존재’로 자리 잡았다. 그래서 5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의 화려한 삶부터 갑작스러운 죽음까지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수 있었다.


Posted by 윤승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