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진로 관련 프리랜서 강사로 일하는 박윤경씨(39)는 요즘 살맛이 난다. 그는 5년을 항공사 승무원으로 근무했고, 5년은 육아로 오롯이 시간을 보낸 ‘경력단절 여성’이다. 육아의 짐을 덜고 재취업에 나섰을 때 단절된 경력이 발목을 잡았다. 취업에 어려움을 겪던 그가 재취업에 성공한 배경에는 서울 성동구의 ‘돌봄 경력인정 프로그램’이 있다.
박씨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몰랐던 직업적 가치관이나 성향은 물론 내가 누군가를 가르치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라며 “육아를 한 5년을 ‘공백기’가 아니라 일한 시간으로 인정받은 덕에 자신감도 생겼다”고 말했다.
성동구는 2021년 11월 전국 지방자치단체 최초로 ‘경력보유여성등의 존중 및 권익 증진에 관한 조례’를 제정했다. 조례는 여성들의 휴직·퇴직 후 육아 등 가사노동을 ‘돌봄 경력’으로 인정하고, 해당 여성들의 취업·창업을 돕고자 마련됐다. 조례를 통해 실제로 재취업에 성공한 사례가 잇달아 나오면서 작지만 의미 있는 성과를 내고 있다.
성동구는 조례를 구체화해 ‘경력인정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프로그램을 통해 육아, 가사노동 등으로 인해 직장을 다니지 못했던 여성들에게 ‘돌봄 경력인정서’를 발급한다. 전문 상담을 통한 취·창업 지원, 이력서 작성 지원 등도 프로그램에 포함된다. 경력인정서를 발급받으면 코딩 강사 양성, 진로·직업 체험 강사 양성, 온라인쇼핑몰 창업 입문 등 성동구가 여는 구체적인 취·창업 프로그램에도 참여할 수 있다.
19일 성동구의 집계를 보면 경력보유여성 조례를 제정한 2021년부터 최근까지 경력인정 프로그램을 통해 76명의 여성이 경력인정서를 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취업한 여성이 27명이다. 아마존 등 해외 온라인쇼핑몰에 판매자 계정을 만들고 창업에 나선 여성도 지난해 9명 나왔다.
성동구가 인증하는 ‘돌봄 경력’을 실제 업무 이력으로 인정해주는 기업들이 아직 많지는 않다. 현재 민간기업 17곳이 성동구의 경력인정서를 업무 이력으로 공식 인정한다는 취지의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그럼에도 경력을 인정받은 이들의 만족도는 높다. 의류업계에서 10년을 일하다 육아를 10년간 한 구자혜씨(39)도 최근 경력인정서를 받았다. 그는 “육아를 하는 동안 ‘나는 집에 있는데 뭘 할 수 있나’라고 생각했지만 경력을 인정받은 뒤 ‘육아했던 시간이 헛되지 않았구나’라고 느꼈다”며 “내 역량도 알게 되고 삶에 희망이 생겼다”고 말했다.
여성들의 돌봄 경력을 인정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확산되고 있다. 경기·전남·세종 등 광역자치단체를 포함한 총 20개 지자체가 여성의 돌봄노동을 경력으로 인정하는 조례를 제정했다. 경기 수원·안양·군포시의 경우 경력인정서를 발급하는 내용도 조례에 담았다.
국회에서는 조례를 법률로 제정하려는 시도도 진행 중이다. 이연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달 20일 ‘경력단절여성’이라는 단어를 ‘경력보유여성’으로 바꾸고 돌봄노동도 경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한 ‘여성의 경제활동 촉진과 경력단절 예방법 일부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정원오 성동구청장은 “개정안이 법안이 국회 문턱을 통과한다면 여성의 돌봄 노동을 경력으로 인정하는 지자체와 기업이 더 많아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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