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아뜰리에에르메스에서 열리고 있는 김아영의 ‘플롯, 블롭, 플롭’ 전시 전경. 에르메스재단 제공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에는 ‘알 마터’라는 주택 단지가 있다. 이곳의 이름은 ‘한양아파트’이기도 했고, ‘쿠웨이트인 아파트’이기도 했다. 1970년대 석유 파동과 유가 상승 이후 한국 기업들의 중동 건설 붐이 일었고, 한양건설도 사우디에 진출해 알 마터를 지었다. 1990년 걸프전이 발발하며 한양건설은 사우디에서 철수했지만, 알 마터에는 쿠웨이트인 피난민이 들어선다. 알 마터의 존재엔 석유를 둘러싼 중동지역의 현대사가 투영돼 있다.

미술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 중 하나인 김아영(46)은 지난달 21일부터 서울 강남구 아뜰리에에르메스에서 시작한 개인전 ‘플롯, 블롭, 플롭’에서 석유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중동의 이야기를 영상 ‘알 마터 플롯 1991’로 풀어내고 있다. 전시장은 어두운 조명 속 대형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영상과 천장에서부터 매달린 깜빡이는 전구들, 그 사이로 보이는 여러 기호들, 알 마터 한 가구의 도면에서 본뜬 바닥 장식으로 구성됐다. 매달린 기호들은 전쟁에서 탱크, 지뢰, 구호소 등을 묘사할 때 쓰이는 것들이다.

김아영은 지난 2월 LG 구겐하임 어워드를 한국인 작가로는 처음 수상했다. 2023년에는 세계적인 미디어아트상인 ‘프리 아르스 일렉트로니카’의 최고상인 ‘골든 니카상’을 받았다. 올해엔 홍콩 엠플러스(M+)와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의 전시가 예정돼 있다.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긴 작품은 ‘딜리버리 댄서’ 연작이다. 가상공간을 오토바이로 달리는 여성 배달 기사를 다뤘다.

서울 강남구 아뜰리에에르메스에서 개인전 ‘플롯, 블롭, 플롭’을 연 작가 김아영. 에르메스재단 제공

 

1970~1990년대의 석유와 중동 이야기는 생소해 보이지만, 사실 김아영은 2014~2015년부터 이 문제를 다뤄왔다. 당시 그는 ‘제페트, 그 공중정원의 고래기름을 드립니다, 쉘’ 연작을 3부에 걸쳐 내놨다. 각 부는 12명의 목소리로, 또는 배우들의 연기로 형상화됐다. 퍼포먼스 형식의 제3부는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됐다. 그 때의 3부작을 영상화한 것이 이번 작품이다. 김아영은 지난달 20일 기자들과 만나 “10년 전에 리서치한 문서자료, 책들, 걸프전 당시 지도나 신문 기사 등을 시각화하지 못해 아쉬웠는데, 이번 기회를 놓치면 (전시를) 언제 할 수 있을지도 몰랐을 것”이라고 말했다.

영상에는 김아영의 아버지 이야기도 한 축을 이룬다. 그의 아버지 역시 한양건설에 몸담았고, 회사가 사우디에서 알 마터 외에 진행하던 다른 건설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김아영은 “많은 개인사가 들어있다. 끄집어내는 과정이 저로서도 쉽지 않았다”며 “아버지와, 그리고 알 마터 공사에 참여했던 아버지의 지인과 여러 차례 인터뷰했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구 아뜰리에에르메스에서 열리고 있는 김아영의 ‘플롯, 블롭, 플롭’ 전시 전경. 에르메스재단 제공

 

김아영은 리야드의 알 마터를 찾아 현재 거주민과도 인터뷰한다. 지금의 알 마터는 중산층이 살기 좋은 주택 단지로 묘사된다. 하지만 김아영의 과거 작업에도, 지금의 영상에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걸프전이다. 전시명을 이루는 단어 중 ‘플롯(plot)’의 뜻은 ‘극의 구성’이기도 하지만 ‘음모’로도 번역된다.

석유를 둘러싼 지정학적인 문제가 극에 달해 벌어진 걸프전 전황, 전쟁과 관련된 지도가 화면을 메운다. 전쟁 전후 정치인들의 선언과 발표가 아이들의 목소리로 울려 퍼진다. 어두운 실내에서 전구의 노란 불빛이 점멸하면서 긴장감도 고조된다.

과거 작업의 재구성이지만, 김아영은 이번 전시에도 인공지능(AI)을 기반으로 한 영상변환, 3차원 가우시안 스플래팅 등 최신 기술을 사용했다. 김아영과 가족의 사진이 영상 속에서 3차원으로 입체화되는 연출이 눈에 띈다.

김아영은 “제가 혁신의 아이콘이라고 묘사되기도 하지만, 저는 디지털 이전 시대의 작가”라며 “과거와의 화해를 위해 미래를 끌어온다. 저는 미래보다 과거가 늘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전시는 오는 6월1일까지.

Posted by 윤승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