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을 굳게 다물어도 눈이 말할 때가 있다. 사진 작가 육명심(1933~2025)의 ‘백민’ 연작 중 ‘강원도 강릉’(1983)은 그렇게 보는 이를 멈춰 세운다. 육명심은 1970년대 ‘한국적인 것’을 탐구하고자 다양한 인물 군상을 사진으로 담았다. 화면을 채운 농촌 지역의 무속인들과 농민들의 표정은 담담하지만, 눈빛만으로도 묘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뮤지엄한미 삼청본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은 한국 사진의 선구자 4명을 기리는 전시다. 육명심은 한국인, 홍순태(1934~2016)는 서울이라는 도시, 한정식(1937~2022)은 자연과 사물, 박영숙(1941~2025)은 여성에 각각 주목해왔다. 육명심의 인물처럼 다른 세 작가가 포착한 대상들은 사진 속에서 뚜렷한 특징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홍순태의 ‘청계천’과 ‘서울’ 연작에서는 지금 상상할 수 없는 서울의 옛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청계천이 복개되기 전 밀집했던 판자촌과 물을 따라 놀던 아이들의 모습이 담겼다. ‘서울’ 연작 중 ‘중구 명동’(1971)에서 한 노인은 경향신문 뭉치를 들고 잔뜩 경계 어린 눈빛으로 카메라를 노려보며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여성에게 가해진 억압에 저항해 온 박영숙의 초기 연작 ‘36인의 포트레이트’도 함께한다. 4명 중 유일한 여성 작가인 그는 여성이 사진을 찍는 주체로 인정받기 어려울 때부터 활동했다. ‘36인의 포트레이트’는 박영숙이 1979년 유방암 수술을 받은 뒤 삶을 돌아보며 그간 만난 예술가들을 촬영했는데 대부분 여성이다. 가수 한영애, 배우 박정자의 젊은 시절을 보는 것도 흥미롭다.

한정식은 인물이 아닌 자연과 사물을 사진에 담았다. 대표 연작 ‘고요’는 사람이나 생물이 끼어들 틈이 없을 만큼 화면에 자연이나 사물을 꽉 채워 담아냈다. ‘경상남도 양산 영축산 통도사’(2006)는 고찰을 이루는 나무를 가까이 촬영했는데 나뭇결이 한 폭의 추상화처럼 찍혔다. 사진 속 자연과 사물을 보고 있으면 고요한 바람이 부는 산사 한가운데 있는 것만 같다. 전시는 7월19일까지. 관람료는 성인 1만5000원.

서울 종로구 PKM갤러리에서는 현역 사진작가 이정진(65)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지난해 영국과 스위스에서 공개한 신작 ‘Unseen’ 연작(2024)을 국내에서 처음 선보인다. 이정진은 2024년 5월 아이슬란드를 방문해 거친 바람과 파도, 매 순간 변하는 날씨를 촬영했다. 1980년대 미국에서 사진을 공부하며 주로 찍었던 미 대륙의 사막과는 정반대의 환경이었다.
가디언은 지난해 런던에서 열린 그의 ‘Unseen’ 연작을 가리켜 “우리 내면의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는 풍경”이라고 평가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은, 내면에서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 눈앞에서 달리 보일 수 있다.
이정진은 한지에 붓으로 감광 유제를 바른 뒤 그 위에 사진을 인화하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흑백으로 촬영한 사진을 자세히 보면 감광 유제를 여러 차례 바르는 과정에서 남은 붓질이 보인다. 남에게 맡길 수 없는 이 작업에만 10개월이 걸렸다. 작가가 명상에 빗댈 만큼 수고한 흔적이 작품에 남아 있기 때문인지 사진에 담긴 물과 파도와 바위, 빙하의 모습이 경건하게 다가온다. 전시는 다음달 23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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