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12월. 광장에는 수많은 이들이 모였다. 아직은 보수적인 도시인 서울,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쉽지 않은 이들도 목소리를 냈다. 작가 정은영의 21분 영상 ‘병든 서울’(2026)에는 깃발과 응원봉을 들고 한겨울 거리에 선 퀴어 공동체와, 스튜디오에서 풍물 등 타악기를 연주하는 성소수자의 모습을 교차해 보여준다. 민주주의 사회의 일원이지만 여전히 불안정한 존재들, 그들이 겪는 서울에서의 삶은 어떤 것인가.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스펙트로신테시스 서울’은 국내 미술 기관에서 처음 열리는 대규모 퀴어 미술 전시다. 퀴어 미술을 다뤄 온 작가 74팀의 작품을 통해 ‘성소수자로 서울에서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스펙트로신테시스는 빛이 무지개색으로 분화하는 현상 ‘스펙트럼(spectrum)’과 집대성을 뜻하는 단어 ‘신테시스(synthesis)’의 합성어다. 성소수자 공동체를 지원해 온 홍콩 선프라이드재단은 2017년 대만 타이베이, 2019년 태국 방콕, 2022년 홍콩에서 같은 이름의 전시를 열었다.

개최 도시의 이름이 제목에 붙은 것은 서울 전시가 처음이다. 세계적 주목을 받는 글로벌 도시이지만, 성소수자들이 퍼레이드를 할 때마다 거센 반대와 마주하는 곳, 서울은 묘한 위상의 도시다. 이곳에서 외줄 타기하듯 활동해 온 국내 성소수자 작가들부터, 올해 베니스비엔날레 튀르키예관 대표 작가인 닐바 귀레쉬 등 해외 작가들에 이르기까지 출품 작가는 다양하다. 알폰소 오소리오의 수채화 ‘무제(W41-007)’(1941), 애니 레보비츠의 사진 ‘수전 손택, 뉴욕, 1991’(1991) 등 비교적 오래된 선프라이드재단 소장품도 만날 수 있다.

오인환의 설치작업 ‘남자가 남자를 만나는 곳, 서울’(2026)은 가로·세로 각 4m인 바닥에 서울의 게이바나 클럽의 이름을 향가루로 써 놓고 태운다. 성소수자에게는 친숙하지만, 다른 이들에겐 낯선 이름들은 전시 공간에 향을 내뿜으며 타오른다. 바닥과 같은 녹색으로 쓰여 잘 보이지 않던 이름들이 불탄 뒤 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내면서 보는 이의 뇌리에 향과 함께 박힌다.
지난해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국내 첫 개인전을 열었던 미국의 퀴어 작가 마크 브래드포드는 전시를 위해 신작 ‘밑바닥(Nadir)’(2026)을 선보였다. 파마를 할 때 모발 끝에 붙이는 종이인 엔드페이퍼(end paper)를 잇달아 붙인 작품이다. 브래드포드의 상징인 엔드페이퍼는 성소수자들의 아지트였던 미국의 미용실을 상징한다. 오인환과 브래드포드의 작품이 가까이 배치돼 외부의 시선에 맞선 성소수자들의 연대를 떠올리게 한다.
전시장 다른 층에서는 이강승이 성소수자 공동체의 역사를 다룬 아카이브를 여러 점 선보이고 있다. 1990년대 게이 인권단체 ‘친구사이’의 소식지,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혐오의 대상이 된 이태원 게이 클럽 로고 등이 작품으로 재구성됐다. 불법 계엄 때의 농민과 여성, 성소수자의 참여와 저항을 그린 이반지하의 역사화 ‘지금 여기 대한민국에서 살아있다는 것 2025’(2026) 등은 거시적으로 서울의 성소수자 이야기를 다룬다. 전시장 한편에서는 성소수자의 내밀한 일상을 파격적으로 다룬 작품도 있다.

아트선재센터는 지난해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개인전을 열면서 1층 입구 앞에 흙더미를 쌓아 출입을 막는 파격적인 전시 구성을 선보였다. 이번 전시에도 파격적인 구성이 이어진다.
구자혜의 ‘퇴장하는 등장’(2026)은 여자 화장실에 캐비닛을 갖다 놓고 거울과 벽면, 바닥에까지 여러 문구를 새겨 넣은 설치 작품이다. 어떤 문구는 조명으로 캐비닛을 비춘다. 연극의 대사 같으면서도 불분명해 보이는 글귀들은 언어가 어떤 집단에는 배타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있다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1층 입구를 막은 전광판에는 남성 향수 광고처럼 보이는 영상이 상영되는데, 영국 런던 기반의 작가 신 와이 킨의 ‘에센스’(2024) 연작이다. 영상 속 말을 타고 등장하는 수염 난 인물은 트랜스젠더인 작가 본인을 투영한 것인데, 그가 등장한 현수막 또한 전시장 외벽에 걸려 있다.

전시장 내부엔 향수 모양 ‘에센스(보틀)’(2024)가 있는데, 향수병 안에 든 것은 투명색의 조향용 알코올이다. 미디어 등에서 묘사되는 남성성의 이미지로 포장된 것의 공허함을 상기시킨다. 그의 작품에서 묘사하는 것은 서울 시내를 채운 대형 전광판에서 끊임없이 재생되는 것이기도 하다. 성소수자를 소재로 한 작품 속에서 도시 ‘서울’의 잔상이 강하게 남는 건 그 때문일까.
전시는 6월28일까지. 관람료 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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