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원주시 뮤지엄산에 전시된 이배의 ‘불로부터’(2026). 뮤지엄산 제공

 

기다려야 한다. 씨앗이 자라 열매를 맺으려면, 나무가 불을 만난 뒤 다시 식어 숯이 되려면.

‘숯의 작가’ 이배(70)가 강원 원주시 뮤지엄산에서 연 개인전을 보면 기다림을 생각하게 한다. 전시 제목(En attendant : 기다리며), 그가 만든 조각과 그림, 퍼포먼스, 그리고 그의 이력을 통해.

전시장 입구 앞에 서 있는 8m 높이의 설치 작품 ‘불로부터(Issu du feu)’(2026)는 무게가 총 7t에 이르는 나무의 숯을 쌓아둔 것이다. 입구를 막은 것 같기도, 처마를 떠받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주재료인 느티나무로 숯을 만드는 과정은 곧 기다림이다. 나무를 까맣게 태우는 데 2주, 그 나무를 식히는 데 2주, 땔감에 불을 붙여 태우는 것 이상의 정성과 한 달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숯이 쌓인 모습을 보면 달집태우기가 연상된다. 정월대보름에 나무나 짚을 높이 쌓아 달집을 만들고 불을 붙여 질병과 근심 없는 새해를 기원하던 오랜 풍속이다. 전국에서 달집태우기를 가장 큰 규모로 진행하는 곳이 경북 청도다. 이배가 농부의 아들로 자란 고향이며, 이배의 작업 주재료인 숯을 굽는 가마가 위치한 곳이기도 하다.

강원 원주시 뮤지엄산 청조갤러리 로비에 전시된 이배의 ‘붓질’(2026 ) 연작. 원주 ❘ 윤승민 기자

 

전시 개막을 하루 앞둔 지난 6일 기자들과 만난 이배는 “한 40년을 외국에서 살다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전시는 ‘근원’에 집중하고 나를 재확인하는 시간”이라며 “제 맘 속 깊이 ‘난 농부의 아들’이란 생각이 굉장히 많이 자리 잡았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님이 농부셨는데, 제가 화가가 된다고 할 때 화를 내시고 싫어하셨다. 아버지는 제가 농부가 되길 원했고, 자신이 가꾼 과수원과 땅을 누구에게 줘야 하나 허탈해하셨다”며 “퍼포먼스도, 시골에서 모심기 하기 전 물을 댄 곳에서 뛰어놀고 자라며 성장했던 생각을 하면서 준비했다”고 말했다.

이배는 영상 및 설치작 ‘Becoming’(2026)에 청도에서 흙을 공수하고는 밭을 만들었다. 배경으로 걸린 9m 높이 스크린에는 청도의 논밭에서 몸만한 붓을 온몸으로 움직이는 이배의 모습이 상영된다.

이배는 기자들 앞에서 직접 어깨 높이의 대형 빗자루를 든 채 나타나 흙바닥을 쓸어내는 퍼포먼스도 선보였다. 그가 쓸어내린 흙바닥에는 전시가 이어지는 연말까지 식물이 자란다고 한다. 씨를 뿌리고 열매를 맺기까지 기다려야 하는 농부의 일상이 자연스레 겹쳐졌다.

이배가 지난 6일 강원 원주시 뮤지엄산에서 개인전 ‘En attendant : 기다리며’를 앞두고 기자들 앞에서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다. 원주 ❘ 윤승민 기자

 

흰 종이 위에 거친 붓질로 드러나는 숯의 색. 이배의 상징은 전시장 로비에 선 대형 회화로, 전시장 그 자체로 나타났다. 로비엔 높이 2.27m, 너비 1.82m의 대형 종이에 압착한 숯가루를 붓질로 그려낸 그림 16점 ‘붓질(Brushstroke)’(2026)이 놓였다. ‘White’로 명명된 청조갤러리1은 공간이 하얀색으로만 채워졌다. 공간 한 가운데엔 천장에서부터 늘어진 흰 종이가 놓였고, 한쪽 벽면엔 스테이플러 약 3만5000개를 박아 붓질 그림과 같은 표현을 했다. ‘Black’이라는 이름이 붙은 청조갤러리2에는 캔버스에 서로 다른 방법으로 연마한 숯을 모자이크처럼 배치한 대표작 ‘불로부터’ 6점이 줄지어 전시됐다. 서로 붙은 6점의 작품의 총 너비는 10m가 넘는다. 오벨리스크처럼 우뚝 선 높이 10m 의 숯색 청동 조각 ‘붓질’(2026) 6점은 전시장 건물 외부에서 주변의 산과 어우러진다.

이배는 “대개 조각은 덩어리감을 보는 게 특징인데, 이번에는 그림과 같은 조각, 표면을 보는 조각을 세우고 싶었다”고 말했다. 대형 조각인 ‘불로부터’와 ‘붓질’ 모두 표면에 깊이 파인 선이 도드라진다. 숯으로 만든 ‘불로부터’는 보는 이가 표면을 만질 수 있도록 작품 주변에 차단선도 놓지 않았다. 그는 흰색으로 가득 채운 공간 ‘White’를 만든 이유를 설명하며 “안도 선생이 만든 공간을 살리고 싶다고 생각해 그림을 걸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배는 뮤지엄산을 설계한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를 “굉장히 존경하는 건축가”라고 했다.

강원 원주시 뮤지엄산 청조갤러리1 ‘White’ 전경. 원주 ❘ 윤승민 기자

 

강원 원주시 뮤지엄산 청조갤러리1 ‘White’에 설치된 이배의 스테이플러 작품 멀리서 보면 붓질 그림 같지만(왼쪽 사진) 가까이서 보며 스테이플러임을 알 수 있다. 원주 ❘ 윤승민 기자

 

이배는 “예술을 하면 할 수록, 예술을 잘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전시를 준비하면서 너무 자신없던 적도 많고 절망하고 캄캄할 때도 여러번이었다”며 “작가라는 게 뭔가 생각하게 됐다. 어쩌면 자기가 하는 일을 통해 순수해지려고 하는 노력, 그게 작가가 하는 일 안에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몇년 전 강원 고성에서 산불이 났을 때 작가들과 현장을 갔다. 집 안의 도자기와 밥그릇이 서로 붙어있는 걸 보고 1200~1300도 이상 뜨거웠으리라 생각했다”며 “그 주변에 개미가 올라오는 것을 보고 너무 놀랐다. 자연을 멀리하고 인간 중심으로 살았다는 생각도 많이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전쟁이나 많은 재앙이 생겨나고 있다. 조각을 세우면서 다시는 큰 재앙이 안 왔으면 좋겠다는 인간적인 염원도 했다”고 말했다. 무탈한 일상을 위한 염원과 풍작을 기원하는 농부의 기다림은 서로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전시는 12월6일까지. 기본 패스권 관람료 대인 2만3000원.

강원 원주시 뮤지엄산에 전시된 이배의 청동 조각 ‘붓질’(2026). 원주 ❘ 윤승민 기자

 

Posted by 윤승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