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쇄빙선 아라온호 맹활약

딱 12년 전, 그때도 12월이었다. 남극 세종기지에서 근무하던 젊은 연구원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가 찾으려 했던 실종된 동료들은 무사귀환했지만 정작 본인은 싸늘한 주검으로 나타났다. 당시 27세였던 전재규 대원은 자신의 사망 소식과 함께 해양 연구와 수색을 고무보트에 의존해야 했던 세종기지의 열악한 현실을 함께 알렸다. 그의 희생으로 공론화된 ‘한국 최초의 쇄빙선’은 12년 뒤 벌어진 조난 사고에서 제 몫을 다했다.

20일 해양수산부에 따르면 지난 18일 오후 7시30분쯤 남극 인근 해상에서 좌초됐던 한국 선적의 628t급 원양어선 썬스타호가 19일 오후 1시10분쯤 쇄빙선 아라온호에 인양돼 유빙(流氷)에서 탈출했다. 썬스타호는 ‘메로’로 알려진 이빨고기를 잡는 원양어선으로, 사고 당시 선원과 조업 활동을 감시하는 ‘옵서버’ 등 총 39명이 탑승한 상태였다. 북반구인 한국과 달리 남극의 12월은 여름으로, 남태평양의 원양어선은 상대적으로 따뜻한 이 시기에 남극해까지 내려와 조업활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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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로부터 약 2410㎞ 떨어진 해상에서 좌초된 썬스타호는 다행히 인명 피해나 선체 손상은 입지 않았다. 그러나 유빙에 선체가 박혀 우현으로 13도 정도 기울어졌다. 선원들은 한 쌍을 이뤄 운항하던 같은 선사 어선 코스타호(862t급)로 대피했다. 코스타호는 썬스타호를 인양하려고 했지만 주변 얼음을 뚫지 못해 예인에는 실패했다.

다행히 7847t급 쇄빙선 아라온호가 사고 소식을 접하고 유빙을 깨가며 19일 오전 11시쯤 사고 현장에 접근했다. 아라온호는 썬스타호에 접근한 뒤 밧줄을 연결했고, 아라온호가 움직이자 기울어졌던 썬스타호는 평형을 되찾았다. 

썬스타호는 아라온호를 따라 뉴질랜드 남측에서 80㎞쯤 떨어진 안전지대까지 이동했고, 점검 결과 선체에 이상이 발견되지 않아 조업 활동을 재개했다.

아라온호는 2009년 12월 처음 출항한 국내 첫 쇄빙연구선이다. 바다를 뜻하는 순우리말인 ‘아라’와 전부 또는 모두를 나타내는 관형사 ‘온’을 붙여 만든 이름이다. 아라온호는 길이 110m, 무게 7487t 규모로 헬기와 바지선, 각종 장비를 실을 수 있으며 1m 두께의 얼음을 시속 3노트로 뚫고 항해할 수 있다. 아라온호는 세종기지 보급품 및 남극대륙기지 건설 물자를 수송했고, 극지 결빙해역에서의 지구 환경변화, 자원 조사 등의 본격적인 극지 연구를 맡고 있다.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만 아라온호의 도입 과정에는 세종기지 대원 1명이 희생된 조난 사고가 있었다. 2003년 12월6일, 남극에서의 업무를 마친 동료들의 국내 귀환을 도왔던 대원 6명 중 3명이 세종기지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연락이 두절됐다. 7일에는 세종기지에서 대기하고 있던 대원 5명이 구조에 나섰으나 이들마저도 연락이 끊겼다.

이후 러시아, 칠레 등 세종기지 주변 남극기지 대원들의 구조 덕에 앞서 실종됐던 3명을 포함해 7명이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실종대원을 구조하러 나섰던 전재규 대원은 결국 시신으로 발견됐다. 대원들을 구조하기 위해 전 대원과 동료들이 탑승했던 고무보트는 뒤집힌 채였다. 전 대원은 당시 한국해양연구원 극지연구소 소속으로 파견된 지구물리학 연구원이었다.

이 사고로 남극 세종기지의 열악한 현실이 드러났다. 당시 한국은 연구 및 구난에 필요한 쇄빙선을 보유하지 못한 상태여서, 세종기지는 단 3척의 고무보트만을 가지고 있었다. 실종 대원들이 탔던 1대, 구조대원들이 탔던 1대를 제외한 남은 1대는 사고 당시 비상 구조용으로 대기 중이었다. 한국 대원의 조난 사고에도 한국이 보유한 구난 장비를 가동하지 못한 것이었다.

전재규 대원의 희생에 정부는 “쇄빙선을 먼저 확보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해수부 관계자는 “그전부터 쇄빙선을 확보하겠다는 목표는 있었지만 예산 문제에 부딪혀 어려움을 겪었다”며 “전 대원의 조난 사고 이후 쇄빙선 도입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된 것이 맞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동료들은 국내 최초의 쇄빙선에 ‘재규호’ ‘전재규호’라는 이름을 붙여서 넋을 기려야 한다고도 했다.

전 대원의 이름은 붙지 않았지만 아라온호는 연구와 물자 수송뿐 아니라 조난 사고 때도 큰 역할을 했다. 2011년 12월에는 러시아 선적 어선 ‘스파르타호’를 구조해 ‘남극의 산타’라는 별칭도 얻었다. 아라온호의 또 다른 별명은 ‘전재규의 선물’이다. 전 대원이 남극해를 지나는 배들의 산타가 된 셈이다.

Posted by 윤승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