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기억의 폭풍 속으로

허호준 지음 | 혜화1117 | 300쪽 | 2만3000원

4·3, 아카이브로 본 역사

허호준 지음 | 혜화1117 | 536쪽 | 3만2000원

추정 희생자 최대 3만명.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큰 인명피해가 발생했다는 ‘제주 4·3 사건’의 진상을, 두 사람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엮어낸 논픽션이 <4·3, 기억의 폭풍 속으로>다.

1947년 3·1절 기념대회 후 제주읍을 행진하던 사람들에게 경찰이 총을 쐈다. 경찰은 진상을 규명하기는커녕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경찰과 당국에 대한 제주 사람들의 반감은 커졌고 경찰은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청년들은 육지로 떠나거나 산으로 들어갔다. 산으로 들어간 청년들의 1948년 4월3일 무장봉기를 두고 저자는 “해방 이후 제주사회를 짓누르고 있던 억압과 강탈, 모순덩어리에 대한 격렬한 항의”였다며 “무장봉기 주체세력도 그 분노의 크기를, 강도를 간과했다”고 평가했다.

채진규는 1948년 11월18일, 마을 경비를 보다 산으로 끌려간 ‘납치 입산자’다. 먼저 산으로 들어가 ‘산사람들’이 된 소학교 동기 등 대여섯은 채진규를 산으로 들였다. 다음날 군인들은 “주민들이 산사람들과 내통하고 있다고 강조”하며 보이는 대로 난사했다. 채진규는 경찰에 의해 보도연맹에 가입됐고, 한국전쟁 발발 후 보도연맹원 학살이 벌어지자 “입대해서 전쟁터에 가는 게 낫겠다”며 혈서까지 썼다.

이명복은 스스로 산에 오른 청년 중 하나였다. 그는 1949년 5월 붙잡혔고, 그해 8월 토벌대와 함께 ‘산사람 토벌’에 나섰다. 토벌에 동참하는 줄 알았던 이명복과 동기 수감자의 등 뒤로 토벌대원이 총을 겨눴다. 이명복은 절벽으로 뛰어내려 목숨을 건졌다. 1953년 일본으로 밀항한 뒤 다시는 제주를 밟지 않았다.

1989년부터 2025년까지 제주에서 기자로 일했던 저자는 4·3 사건을 취재하며 들은 증언, 해외를 오가면서까지 확보한 기록 등을 바탕으로 논픽션을 썼다. 해방 직후부터 4·3 사건이 1954년 마무리되기까지의 100가지 장면을 선정하고 그 관련 자료를 추려서는 <4·3, 아카이브로 본 역사>로 펴냈다.

Posted by 윤승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