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9일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이 크게 패배한지 이틀 만에 초선의원들이 목소리를 냈다. 20·30대 초선의원 5명은 “당의 관행과 기득권 구조, 오만과 독선, 국민 설득 없이 추진되는 정책들에 대해 눈 감거나 침묵하지 않겠다”는 입장문을 냈다. 초선의원들은 “당 혁신의 주체가 되겠다”며 성명을 내고 초선의원 전체 모임 ‘더민초’를 공식화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날 이후 민주당 초선 의원들이 당 주류 움직임에 맞선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민주당 주류가 ‘친문재인계’에서 ‘친이재명계’로 바뀐 후에도 초선의 존재감은 찾기 어렵다.
이 대표 체포동의안 표결을 앞두고 더민초는 지난 17일 경기도 양평에서 30여명이 참여하는 워크숍을 열었다. 이 대표는 표 단속을 위해 이 자리에 참석했다. 이 대표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단일대오’를 강조하는 건배 제의도 오가는 등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는 전언이다. 이들 모습에서 이 대표 사법 리스크와 방탄 논란 등 외부의 따가운 시선에 대한 성찰은 찾기 어렵다. ‘민주당 초선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나’라는 목소리가 당 안팎에서 나온다.
■‘팬덤정치’와 열성 지지자 공포
민주당 초선 의원들의 역동성이 보이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팬덤정치’의 문제에서 찾을 수 있다. 강성 지지자들의 거센 목소리에 주류와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상황이 됐다는 것이다.
“다른 욕설은 참을 수 있었는데 ‘공천받기 싫으냐’는 말은 무섭더라.” 민주당 한 초선의원에게 열성 지지자들의 ‘문자 폭탄’에 관해 물었더니 돌아온 답이다. 민주당 의원들은 당 주류와 다른 목소리를 낼 때마다 주류를 지키려는 열성 지지자들로부터 항의 전화와 문자 메시지 ‘테러’를 당한다. 단순한 비난을 넘어 당원들 사이에 ‘적’으로 찍히면 다음 총선 공천도 어려워질 수 있다. 실제 박지현 전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이 이 대표 체포동의안 가결을 주장한 지 닷새만인 20일 그의 출당 징계를 요구하는 청원 글에 대한 동의가 2만명을 넘었다.
‘개딸’로 불리는 팬덤이 공고한 이 대표는 당권을 잡기 전부터 ‘당원 민주주의 확대’를 강조해 온 만큼 이 대표에 반대하는 게 공천에 유리할 리 없다. 의원들의 행보와 메시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평가까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금방 퍼져나가는 정치환경도 의원들을 위축시킨다. 최근 당 안팎에서는 22대 총선의 공천 및 경선 규칙이 열성 당원들의 의사를 더 반영하는 구조로 바뀔 수 있다는 예상도 나온다. 현행 당규는 경선을 권리당원 투표 50%, 일반 국민 여론조사 50%로 치르도록 하고 있으나 권리당원 투표 비율을 더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아직도 남은 ‘108번뇌’의 기억
2020년 4월 열린 21대 총선에서 민주당은 문재인 당시 대통령의 높은 지지율, 정부의 성공적인 코로나19 방역 대응 및 전국민 재난지원금 지급 관련 야당의 실책과 맞물려 180석(더불어시민당 비례대표 17석 포함)을 따내는 압승을 거뒀다. ‘바람’을 타고 원내에 입성한 초선 의원도 전체 의석의 절반에 가까운 82명(현재 81명)에 이른다.
민주당 초선들의 대거 입성은 2004년 17대 총선 때도 있었다. 노무현 정부 초기 49석의 소수 여당이던 열린우리당은 노 대통령 탄핵 소추의 여파로 152석을 가져갔는데 초선 의원만 108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17대 국회 때 우리당은 국회에서 정국 주도권을 잡지 못했고, 후일 108명의 초선은 우리당의 ‘108번뇌’로까지 불렸다.
이 일은 당내 비판으로 노무현 정부가 흔들렸던 기억과 맞물려 민주당의 ‘반면교사’로 남았다. 21대 국회 임기가 시작하기 전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초선 의원들을 만날 때마다 ‘108번뇌의 교훈’을 강조했다. 이는 ‘내부총질’에 민감한 열성 지지자들과 별개로, 당내에서 스스로 의원들이 쓴소리를 주저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한 초선 의원은 “초선 의원들 스스로 너무 조심했고, 선배 의원들도 다른 소리를 내지 말라고 눈치를 줬던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구심이 될 지도자도 없다
이 대표 사법 리스크는 계속되고 있지만 민주당에서는 아직 그를 대체할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민주당 계열 정당에서 계파를 이뤄왔던 수장들은 노쇠했고, 차기 대권 주자로 꼽힌 인물들도 일단 일선에서 물러난 상태다.
이 때문에 최근 민주당에는 전통적인 의미의 ‘계파’가 없다는 말도 있다. 20대 대선 당내 경선 주자였던 이 대표나 이낙연 전 대표와 가까운 의원들이 ‘이재명계’나 ‘이낙연계’로 불리기는 하지만 수장과 소속 의원들 간의 정치적 인연이 길지 않고 조직력도 느슨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친문재인계’가 있지만 문재인 정부 인사들도 검찰의 전방위 수사를 받는 처지라 이 대표와 단일대오를 형성하는 게 불가피하다. 계파가 당의 다양성을 유지하는 하나의 기반으로 작용하기도 했는데 현재는 이마저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침묵하는 다수’가 늘어난 것이다.
21대 총선에서 당선된 의원들 중 상당수는 정치적인 배경과 자산이 없이 ‘외부 인재’로 바람을 타고 합류했다. 이들은 ‘중간 지대’에 머물러 있거나 그나마 당의 주류들과 동조하는 성향을 띈다. 한 재선 의원은 “초선들이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그저 ‘친이재명’ 움직임에 합류하지 않는 정도로만 움직일 뿐”이라고 말했다.
■“정치신인으로 끝날 수도”
전문가들은 초선들이 당의 입장에 휩쓸리는 현실은 개인의 평가뿐 아니라 당내 민주주의에도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진만 덕성여대 교수는 통화에서 “과거 초선들은 나름대로 대의를 위한 지향점에 대한 공감대가 있었고 이를 위해 자신들이 주도해서 여론을 형성하자는 그런 게 있었다”면서 “지금 초선들은 각자 당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 더 호응받는 구조가 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진영정치가 격화되고 (강성) 지지자들의 반응이 두렵기 때문”이라고 배경을 진단했다. 조 교수는 “개혁을 주도해야 할 초선 의원들이 시대적 흐름이나 정신을 고민하지 못하면 앞으로도 정치인으로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미래를 주도하고 개혁하려는 주도권은 미래세대에게 있는 것인데 이 일을 잘못한다면 정치신인에서 끝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는 “당 주류와 다른 목소리를 내기에는 전보다 당내에 강압적인 기류가 있는 것 같다”면서 “당내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도 분위기에 편승하거나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모습을 초선 의원들이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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