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스토브리그 역시 쓸쓸한 찬바람만 불고 있다. 고척 스카이돔에서 경기하는 모습 연합뉴스

 

2019년 야구의 겨울은 또다시 ‘침묵모드’에 들어갔다. FA 시장이 열렸지만 구매자들은 지갑과 입을 모두 닫았다. 보상권에 막혀 협상력이 떨어지는 선수들은 속만 태우고 있다. 도입 3년째를 맞는 에이전트 제도는 사실상 유명무실한 상태다. 구단들은 똘똘 뭉쳐 사실상 담합에 가까운 행보를 보인다. 선출 단장들의 평가는 더욱 냉정해졌고, 더욱 비슷해졌다.

FA 제도를 둘러싼 구단과 선수사이의 논의는 또다시 평행선만 확인한 채 뒤로 미뤄졌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을 포함한 ‘일괄타결’ 방식은 명분쌓기에 지나지 않는다. 겨울이 조용하면 리그의 흥행은 또다시 바닥을 친다. 

그래서 문제는 FA제도다. 복잡한 FA 제도의 탄생과 역사, 문제점 등을 촘촘하게 짚었다. 커트 플러드, 최동원, 임선동은 FA 제도의 탄생 뿐만 아니라 미래를 위해 꼭 기억해야 할 이름이다. 

■FA는 언제 어떻게 생겼나 

자유계약선수(FA) 제도가 한국 프로야구에 도입된 때는 1999년이다. 그 한해 전인 1998년, 시즌 후 삼성에서 뛰던 양준혁이 해태의 임창용과 트레이드됐다. 양준혁은 ‘원치 않은 이적’이라며 반발했고 이는 트레이드 파동으로 번졌다. 결과적으로 양준혁은 이듬해 해태에서 뛰게 됐지만, 일정 기간을 뛴 선수가 자유롭게 다른 구단과 계약할 수 있게 길을 열어줘야 한다는 여론이 힘을 얻었다. 

양준혁은 해태로 트레이드 됐다가 LG를 거쳐 2001년 삼성으로 돌아오게 됐다. 당시 FA 계약 과정에서도 사실상 구단들의 담합 때문에 성사가 어려웠다. 양준혁이 삼성과 입단식을 갖는 장면 연합뉴스

 

해결책으로 FA 제도 도입 논의가 활발히 일었다. 미국 메이저리그는 1976년. 일본 프로야구는 1993년에 FA 제도를 도입한 상태였다. 당시 미국은 6년, 일본은 9년을 뛴 선수에게 다른 구단과 자유롭게 계약할 수 있도록 했다. 한국에는 당시 규약상 ‘자유계약선수’ 제도는 있었지만 선수에게 별다른 권한이 없었다. 구단이 선수의 보류권을 풀 때 선수가 다른 구단과 계약할 권리가 생기는데, 사실상 구단이 선수를 방출하는 수단으로 사용됐다.

1998년 12월29일 한국야구위원회(KBO)는 이사회를 열고 현재의 FA 제도 도입을 결정했다. 기준 요건을 10시즌 동안 충족한 투수와 타자에게 다른 팀과 자유로이 계약하는 권한을 부여했다. 타자는 정규시즌 경기수의 3분의2만큼 출전하고, 투수는 정규시즌 경기수의 3분의2에 해당하는 이닝수를 채우면 한 시즌 기준을 충족한 것으로 봤다. 다만 선수를 영입하는 팀은 보상금 및 보호선수를 내줘야하는 제한이 붙었고, 이는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1999년 시즌 후 제도가 본격 시행됐고, 송진우가 한화와 3년 총 7억원에 계약하면서 프로야구 최초의 FA 계약선수가 됐다. 야수들 중 첫 FA는 LG의 주전포수였던 김동수로, 3년간 총 8억원에 삼성과 계약을 체결했다. 

■FA는 어떻게 변화했나 

한국 프로야구의 자유계약선수(FA) 제도는 ‘여러 시즌을 풀타임으로 활약한 선수에게 자유롭게 이적할 권한을 부여한다’는 게 골자다. 1999년 도입 당시에는 정규시즌 경기수의 3분의2가 ‘풀타임 활약’의 기준점이었다. 타자는 그에 해당하는 경기수를, 투수는 그에 해당하는 이닝수를 돌파하면 됐다. FA가 되려면 풀타임으로 10시즌을 뛰도록 했다가, 2001년에는 9시즌으로 줄었다. 2011년부터는 대졸 선수에 한해 8시즌만 뛰면 되는 쪽으로 문턱이 낮아졌다. 

반면 FA를 새로 영입하는 구단이 원소속팀에 보내야 할 보상금의 폭은 도입 한 해만에 큰 폭으로 뛰었다. 원소속팀은 FA 영입구단으로부터 FA 선수의 연봉 150% 및 보호선수(25명)를 제외한 보상선수 1명을 받을 수 있었다. 보상선수 없이 연봉 200%만 받을 수도 있었다. 이것이 FA 제도 시행 두번째 해인 2000년부터 ‘FA 선수가 직전 시즌에 받은 연봉의 300%’(보상선수 받을 때) 혹은 ‘450%’(보상선수 없을 때)로 바뀌었다. 기준점이 ‘새 팀이 정하는 연봉’이 아닌 ‘원소속팀이 정한 연봉’으로 바뀌면서 원소속팀의 권한이 더 생겼다. 자금력이 강한 팀이 우수 선수를 싹쓸이해 리그의 전력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가 반영된 결과였다. FA 영입 구단의 보호선수 숫자도 25명에서 20명으로 줄었다. 2004년에는 이것이 18명으로 더 줄었다. 이는 2011년 다시 20명으로 늘어났다.

FA들의 몸값이 전반적으로 상승한 2011년에는 보상금이 다시 줄었다. FA 선수 직전 연봉의 200%(보상선수 받을 때)와 300%(보상선수 없을 때)로 줄었다. 다만 FA 선수들의 몸값이 전반적으로 오르면서 구단이 FA를 영입하면서 지출해야하는 비용은 크게 줄어들지 않게 됐다. 때문에 각 구단들이 준척급 이하 FA 영입에 관심을 두지 않게되는 상황이 최근 들어 심화됐다. 

 

■FA 제도에 ‘자유’가 없다 

FA 제도가 ‘자유계약선수’라는 이름과 달리 여전히 문제가 되는 것은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형식적으로는 FA 자격을 얻으면 다른 팀으로 옮길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다른 팀으로의 이적이 불가능하다. FA 선수가 다른 팀과 계약할 때 발생하는 보상선수와 보상금액이 결정적 문제다. 

노경은은 지난해 FA 자격을 얻었지만 원 소속팀 롯데 외 다른 팀과 계약하지 못한 채 1년을 ‘무직’으로 보내야했다. 노경은은 ‘자유’를 누리지 못했고, 결국 다시 롯데와 계약했다.

몇년째 스토브리그가 잠잠한 것 역시 ‘보상권’이라는 ‘허들’ 때문이다. 보호선수 20명 외 1명에다 직전 연봉의 200%에 해당하는 보상금은 영입 구단으로서는 상당한 부담이다. 1군 엔트리가 27명인 점을 고려하면 FA 선수를 영입하기 위해 1군 선수 1명을 내줘야 하는 셈이다. 아주 뛰어난 특급 선수가 아니라면 선수 영입 때 득보다 실이 더 많다. 지난 2년간 보상권을 감수하고 팀을 옮긴 FA는 강민호(롯데→삼성), 민병헌(두산→롯데·이상 2018년), 양의지(두산→NC·2019년) 등 3명이 전부다. 

보상권 외 FA 재자격 기준도 문제다. 한 번 FA가 돼서 팀과 계약하면 다시 풀타임 4시즌(1시즌은 145일 이상 1군 등록)을 채워야 FA 자격을 얻는다. 계약기간과 관계없이 최소 4년 동안 다시 ‘자유’가 사라진다. 

현 제도 아래서는 현실적으로 양의지급 아니면 다른 팀으로 옮기기가 쉽지 않다. 양의지가 NC 입단식에서 질문에 답하는 모습 연합뉴스

 

정근우는 2018시즌을 앞두고 한화와 2+1년 계약을 했다. 특정 기준을 채우면 자동으로 1년 계약이 추가 보장되는 형태였지만 부상 때문에 그 조건을 채우지 못했고, 2년 계약이 끝났다. 상식대로라면 계약이 끝났으니 다시 ‘자유계약선수’가 되는 게 맞지만, 정근우는 FA가 아닌 ‘그냥 보류선수’로 남는다. 2차 드래프트를 통해 LG로 이적했고, 그냥 연봉 협상을 해야 하는 신분이다. 

애초에 FA 자격을 얻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145일 이상 1군 등록한 시즌이 9년(고졸, 대졸은 8년) 쌓여야 한다. 2019년 FA 자격을 처음 얻은 선수는 모두 11명밖에 되지 않는다. 이중 오지환 안치홍이 10시즌만에, 김태군 김선빈 전준우 이지영이 11시즌만에 어렵게 자격을 얻었다. 고효준은 2002년 입단 뒤 18시즌만에 처음으로 FA 자격을 얻었다.

■구단 vs 선수 쟁점은? 

구단과 선수들 사이의 FA 제도 개선 논의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 또다시 무산됐다. KBO 구단들은 찔끔찔끔 개선안을 내놓았고, 선수들은 차라리 법적 판단을 받는게 낫다며 이를 거부했다. 

구단과 선수사이의 의견이 충돌하는 가장 큰 지점은 역시 보상권이다. 구단이 내놓은 등급제의 장벽이 여전히 높다는 지적이다. 구단별 최근 3년 평균 연봉 상위 3위(리그 전체 30위) 이내 선수가 A등급, 4위 이후가 B등급으로 나뉘는 방식이다. A등급은 보호선수 20명, B등급은 23명, C등급은 보상선수가 없는 안이 제시됐다.

선수들이 거부한 이유 중 하나는 B등급의 보호선수가 지난해 안이었던 25명에서 오히려 후퇴한 23명으로 줄었다는 점이었다. 선수측 관계자는 “오히려 후퇴한 안을 두고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선수들이 주장하는 FA 재자격 조건 폐지는 구단들이 받아들이지 못한다. 수도권 구단의 한 단장은 “야구 잘하는 선수가 부족한 리그 현실을 고려할 때 FA자격을 얻은 선수들이 계속해서 FA 자격을 갱신하는 식으로 쏟아져 나오면 구단들이 FA들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다른 관계자는 “구단별 자생력이 없는 가운데 부자 구단만 FA들을 쓸어가 성적을 내는 환경이 된다. 리그 전력 균형을 해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 때문에 구단들은 이번 개선안에 사치세를 포함한 샐러리캡 안을 포함시켰다.

리그 대표적 악법으로 평가받는 ‘고액선수 연봉삭감제’가 여전히 남아있는 것도 선수들이 반대하는 이유다. 고액 연봉 선수가 성적 부진으로 2군에 내려갈 경우 해당 기간 동안 연봉의 50%를 삭감하는 제도다. 부진 여부의 판단, 2군행 등이 모두 특별한 기준이 없는 자의적 결정이라는 점에서 악법으로 꼽힌다. 

고액선수 연봉삭감제는 FA 제도 도입 직후인 2001년 처음 생겼다. 2004년까지 1억원이었던 고액연봉 기준은 2005년부터 2016년까지 2억원으로 바뀌었고, 2017년부터 현재까지는 3억원이다. 2019시즌 연봉 3억원 이상 선수는 66명이었다.

■커트 플러드, 최동원, 임선동 

메이저리그에서는 3억달러 넘는 FA 계약이 벌어지고 있지만, FA 제도가 생긴 것은 이제 막 40여년이 흘렀을 뿐이다. 앞서 거의 100년 동안 메이저리그에도 ‘자유’는 없었다. 한 번 계약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1969년 구단의 선수에 대한 권리인 ‘보류권’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다. 세인트루이스 외야수 커트 플러드가 그해 말 필라델피아로의 트레이드를 거부하면서 시작됐다. 플러드는 보위 쿤 커미셔너에게 부당함을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메이저리그 전체를 상대로 소송에 들어갔다. 선수들은 심정적으로 지지했지만, 구단의 보복이 두려워 아무도 재판에 증인으로 나서지 않았다. 플러드의 외로운 싸움은 1972년까지 이어졌고 결국 대법원 판결 결과 5대3으로 커트 플러드가 패했다. 밥 깁슨은 당시 상황에 대해 “플러드는 하루에도 4~5차례씩 살해 협박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재판이 끝날 때쯤 플러드의 선수생활도 끝났지만, 플러드의 목숨을 건 소송이 ‘불씨’를 피웠다. 1976년 데이브 맥널리와 앤디 매서스미스가 보류권 폐지를 계약 조건으로 내걸었고, 결국 선수노조는 메이저리그 사무국으로부터 6년 이상 뛴 선수는 다른 팀과 계약할 수 있는 FA 제도를 쟁취했다.

지난 2011년 고 최동원 전 감독의 영결식이 열리고 있다. 경향DB

 

KBO리그도 비슷한 과정을 겪었다. FA 제도가 생긴 것은 1999년부터지만 그 전부터 ‘희생’이 있었다. 고 최동원은 1988년 9월 대전 유성온천 관광호텔에서 나머지 7개구단 대표들과 함께 프로야구선수협의회를 발족했다. 초대 회장은 최동원이었다. 노조로 발전할 것으로 우려한 구단들의 강경진압이 있었다. 결국 최동원은 김용철과 함께 삼성으로 트레이드 됐다. 최동원은 이후 삼성에서 두 시즌을 뛰고 쓸쓸히 은퇴를 해야 했다. 선수협의회는 2000년 1월 송진우 회장 체제로 다시 명맥을 잇는다. 선수협회는 2001년 KBO리그의 불합리한 보류권을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소했고, 이를 통해 시정명령을 받아낸 바 있다.

하지만 KBO리그에서 FA 제도가 도입된 결정적 계기는 선수협회에 앞서 벌어진 ‘임선동 파문’이었다. 임선동은 연세대 4학년이던 1995년 일본 프로야구 다이에 호크스와 계약했지만 고교 졸업 당시 임선동을 지명했던 LG가 반발했다. 결국 KBO가 NPB와의 합의 끝에 ‘LG의 동의 없이 다이에로 가지 못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임선동이 이에 반발해 소송을 걸었다. 재판결과 LG에서 2년 뛴 뒤 원하는 팀으로 이적이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사실상 첫번째 FA였다. 모든 자유는 희생에서 나온다. 

이용균·윤승민 기자 noda@kyunghyang.com

Posted by 윤승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