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87세의 일기로 별세한 국민 배우 최불암은 67년 연기 인생 동안 많은 대표작을 남겼다. 정의감과 인간미를 겸비한 수사반장부터, 근엄하고 인자한 아버지, 농촌 마을을 지키는 회장까지 우리 곁에 있는 가족과 이웃의 삶을 연기해 ‘국민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의 초기 출세작은 MBC <수사반장>이다. 1971년 첫 방송 이후 1989년까지 20년 가까이 방영된 이 드라마는 한국 수사물의 전범이었다. 최불암은 극 중 서울시경 특별수사본부의 반장 ‘박영한’을 연기했다. 정의감 넘치면서도 인간미 넘치는 박영한은 급속한 산업화·도시화가 부른 범죄의 이면을 들여다보며 사회적 모순 때문에 범죄에 내몰린 사람들에게 연민을 내보였다. 권위적 경찰보다는 현장을 발로 뛰며 동료 형사들과 함께 사건을 해결하는 모습을 보였다. 최불암은 묵직한 목소리와 진중한 연기로 박영한의 강직함과 따뜻함을 잘 드러냈다. 트렌치코트와 당시 분장한 흰머리는 그의 상징이었다.
긴 세월이 지나며 <수사반장> 속 박 반장의 팀원을 연기한 배우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최불암만이 마지막까지 생존했다. 박영한이 떠나간 팀원들을 추모하는 장면이 2024년 드라마 <수사반장 1958>에 등장하기도 한다. 최불암은 경찰의 이미지를 개선했다는 공로를 인정받아 1972년 명예 경찰에 위촉된 후, 2024년에는 민간인 중 최초로 명예 국가수사본부장(치안정감)이 됐다.

‘국민 아버지’의 이미지를 굳힌 것은 MBC 드라마 <전원일기>에 출연하면서다. 1980년부터 방영해 2002년까지 총 1088부작 방영된 <전원일기>에서 최불암은 ‘양촌리 김 회장’ 역을 맡아 인자하면서 엄격한 아버지상을 보여줬다. 젊은 시절 여자 문제를 일으키고,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면모로 가족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주민들이 갈등을 겪거나 어려움에 처하면 문제 해결에 나서는 마을의 ‘어른’ 역할도 했다. 김 회장 옆에서 인자한 아내의 모습을 보여준 배우 김혜자 또한 ‘국민 어머니’로 불렸다. 두 사람은 실제 부부가 아니냐는 오해도 많이 받았다. 농촌 마을 양촌리를 배경으로, 방영 시기에도 점차 사라져가는 대가족의 모습을 보여주고 고향에 대한 향수도 달랬다.

1997~1998년에는 MBC 주말연속극 <그대 그리고 나>에 출연했다. 그가 맡은 ‘박재천’은 외항선 선장 출신으로 ‘캡틴 박’이라 불리는 인물이다. 정의로운 박 반장, 근엄한 김 회장과 다르게 왕년의 마도로스(외항선 선원)로 자유분방하며 철없는 홀아비 역할을 맡았다. 이상적인 아버지상보다는, 자녀들과 갈등하며 실수도 저지르는 현실적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줬다. 최진실·박상원·차인표·송승헌 등 주연급 배우들이 즐비한 가운데서도 ‘홍지성’(박원숙)과의 로맨스 연기를 소화하며 극 중 존재감이 컸다. <그대 그리고 나>는 마지막회 시청률이 66.9%에 이를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최불암은 젊은 시절부터 유독 노인 역할을 많이 맡았다. 연출가를 꿈꿨던 그는 연극을 준비하던 중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는 노인 역을 맡았다가 연기력을 인정받고 배우의 길로 들어섰다. 최불암은 1967년 서울중앙방송(현 KBS) <수양대군>을 통해 안방극장에 처음 데뷔했는데, 당시 20대 후반이었던 최불암은 50대 장군 김종서 역을 맡았다. 1969년 MBC <역풍>에서는 80대 노인을, 30대엔 <수사반장>에서 정년 퇴임을 앞둔 박 반장 역을 맡았다. 40대 초반인 1981~1982년 MBC <제1공화국>에서는 80대의 이승만 전 대통령을 맡았다. 성인 배우들을 자녀로 뒀던 <전원일기>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았다. 젊은 배우들이 기피하던 노역은 최불암의 장기가 됐고, ‘국민 아버지’라는 배우 정체성의 밑거름이 됐다. 오히려 2008년 SBS 드라마 <식객>에서는 꽁지머리를 한 궁중요리 권위자 오성근 숙수를 선보이는 등 연기 변신을 이어갔다.

영화에도 여럿 출연했다. <빛과 그림자>(1967)를 시작으로 <영자의 전성시대>(1975), <진짜진짜 좋아해>(1978), <바람불어 좋은날>(1980),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등이 있었다. 1990년대에는 드라마에 집중하다 2004년 <까불지마>에서 오랜만에 스크린 나들이를 했다. <까불지마>는 비슷한 연배의 배우 오지명이 감독을 맡았고, 오지명·최불암·노주현 등 당시에도 중노년급인 배우들이 코믹 액션을 선보여 화제가 됐다.
그의 마지막 연기는 <수사반장 1958>에서 노년의 ‘박영한’ 역할이었다. <수사반장 1958>은 <수사반장>의 프리퀄 작품으로, <수사반장>으로 박 반장의 수사팀이 모이기 전 시간대의 이야기를 담았다. 청년 ‘박영한’은 배우 이제훈이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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