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나집 라작 총리는 우크라이나 동부 친러시아 반군과의 협상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반군과 직접 협상을 한 것은 외교적 결례라는 비판이다.
대한항공 여객기는 과거 두 차례나 공중에서 피격되는 비극을 겪었다. 1978년 파리를 출발해 서울로 가던 대한항공 902편은 항법장치 이상으로 의도치 않게 소련 영공을 날았다. 사고기는 소련과의 교신에도 실패했다. 결국 소련군 전투기의 미사일을 맞았고, 소련 북서부 무르만스크에 불시착했다. 당시 2명밖에 숨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여겨질 만큼 더 큰 피격사건이 1980년에 벌어졌다. 미국 뉴욕을 출발해 서울로 가던 대한항공 007편이 이번엔 사할린섬 근처를 비행하다가 소련 전투기에 공격을 당한 것이다. 비행기는 바다로 추락해 탑승객 269명이 모두 숨지고 말았다. 당시 사망자수 규모가 가장 큰 여객기 피격사건이었고, 전투기가 민항기를 공격했다는 이유로 미국-소련 관계가 한동안 얼어붙었다. 민항기가 영공을 침범해도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1984년 개정된 국제민간항공협정에 포함됐다.
넉 달 만에 또 탑승객 전원 사망
대한항공이 2년 새 두 차례 비극을 겪었다면, 말레이시아 국영 항공사인 말레이시아항공은 불과 넉달 만에 대규모 항공기 사고를 두 차례나 당했다. 지난 3월 8일 탑승객 239명을 태우고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를 출발해 베이징으로 향하던 MH370편은 아직 잔해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 7월 17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쿠알라룸푸르로 향하던 MH17편은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미사일에 피격돼 탑승객 298명이 모두 숨졌다. 두 사건 모두 정확한 사고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연이은 사고로 탑승객 537명이 가족들의 품을 떠나버린 것만 확실할 뿐이다.
‘Pray for MH370’(MH370편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에서 숫자 370만 17로 바뀌었다. 탑승객들을 잃은 전 세계의 가족들만큼 말레이시아도 비탄에 잠겼다. 사실 두 차례의 사고에서 말레이시아인들의 슬픔은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사망자가 가장 많이 나온 나라가 두 차례 모두 말레이시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3월 실종된 MH370에는 중국인 탑승객이, 7월 피격당한 MH17에는 네덜란드인 탑승객이 가장 많았다. 중국인 실종자 가족들은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수색 결과에 오열하며 항의했다. 네덜란드인들은 우크라이나에서 도착한 싸늘한 주검을 차분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외신들이 비중 있게 보도한 이들의 모습들만큼, 연이어 사고를 겪은 말레이시아의 분위기도 침통했다. 호주 ABC방송은 “7월 MH17 피격 직후 쿠알라룸푸르는 지난 3월의 데자뷰 같았다. 말레이시아는 깊은 슬픔과 분노, 불신으로 가득차 있었다”고 묘사했다.
원인도 알 수 없는 사고였는데, 분노와 불신은 어디로 향했을까. 3월 말레이항공 실종 때 무능하게 대처한 정부였다. 사고 원인뿐 아니라 이동경로, 추락지점 등 모든 것이 미스터리였던 지난 3월 실종 때 정부는 사고에 대한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오전에 여러 언론과 관련 전문가들이 실종과 관련된 여러 가능성을 제기하면, 오후에 정부가 보도내용을 부인하는 일이 며칠간 반복됐다. 그러면서도 정부가 사고에 대해 내놓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실종자 가족들을 중심으로 정부에 대한 불신이 싹텄다. 정부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국왕과 무슬림 기득권층이 정치를 좌지우지하면서 집권여당이 선거에서 한 번도 패한 적 없는 말레이시아였기에 이 같은 추론이 나왔다.
친러 반군을 사실상 정부로 인정
비난의 화살은 나집 라작 총리에게로 향했다. 그 때문인지 7월 MH17편 피격 때 라작 총리는 그때의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라작은 사고기의 블랙박스를 확보했다는 우크라이나 동부 친러시아 반군과의 협상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확보한 사람은 라작이 됐다. 이 과정에서 라작은 말레이시아군을 동원해 친러 반군과의 연락점을 수소문했고, 반군이 세운 ‘도네츠크인민공화국’의 지도자인 알렉산더 보로다이와 직접 연락하는 데도 성공했다. 주말인 7월 19~20일 협상한 끝에 21일 속전속결로 타결했다. 동시에 라작은 우크라이나 사고 수색 현장에 말레이시아 전문가들을 급파했다. 23일엔 의회에서 “미사일 피격 용의자를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제소하겠다”고 선언했다. 야당 정치인들까지 “라작의 협상은 블랙박스를 확보하는 데 결정적이었다. 칭찬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모든 것이 이례적이었다.
그러나 라작의 행동이 큰 의미가 없다는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다. 우선 말레이시아는 이 사건 조사를 ICC로 끌고갈 수 없다. ICC는 로마 조약을 비준한 국가에서 일어난 사건을 관할해 처벌할 수 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말레이시아는 모두 로마 조약을 비준한 나라가 아니다. 오히려 라작과 친러 반군의 협상이 도마 위에 올랐다. 우크라이나 정부가 있는데도 국가원수가 반군과 직접 협상을 한 것은 외교적 결례인 데다가, 라작이 친러 반군이 정당성을 주장하는 ‘도네츠크인민공화국’을 사실상 정부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사고지역을 ‘도네츠크인민공화국’이라 칭했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 그리고 반군과 대립 중인 우크라이나는 반발했다. 이번 사고로 미국·서방 대 러시아의 대립구도가 다시 뚜렷해진 가운데, 미국과 유럽은 이번 사고의 책임이 친러 반군과 러시아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전통적으로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중립을 지켰지만, 라작 역시 이번 사고의 책임을 우크라이나가 아닌 러시아 쪽에 돌렸다. 라작은 친러 반군의 정부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반군이 말레이시아와만 협상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서방국가들이 “친러 반군은 모든 피해국가와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말레이시아의 단독행동 때문에 어려워진 것이다. 결국 전례없던 외교적인 성과라던 라작의 행동은 유럽과 서방의 외교를 방해한 것이라는 비판을 들어야 했다.
라작의 적극적인 외교가 말레이시아인들에게도 성공적이었는지는 의문스럽다. 호주 퀸즈랜드대의 게르하르트 홉스태터 박사는 “라작이 이번에 옳은 일을 하려고는 했지만, 성공적이진 못했다”며 “무슬림들은 시신을 가능한 한 빨리 매장하는 것이 전통인데, 그에 비해서는 말레이시아 정부의 시신 수습과 확보가 늦었다”고 CNN방송에 말했다. 호주 모나시대 쿠알라룸푸르 캠퍼스의 정치학 교수 제임스 친은 “국민들은 협상이 어떻게 됐는지 관심이 없다. 그들에겐 가족들의 시신을 다시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평가했다. ABC방송은 올해에만 27명의 동료를 잃은 말레이항공 직원 수백명이 “우리도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까”라고 말하며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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