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 한 달 뒤인 6월 22일 태국 교육부 산하 국가개발행정연구원이 발표한 차기 총리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41.3%가 쿠데타를 주도한 쁘라윳을 지목했다.
2014년 5월 22일, 태국 군부가 또다시 정권을 장악했다. 지난해 11월부터 친정부·반정부 시위로 야기된 사회 혼란을 잠재우겠다며 계엄령을 내린 지 불과 이틀 만이다. 계엄령 이후 군부는 정치인들과 시위대 지도자들을 불러모았다. 사흘간의 회의가 결론 나지 않자, 계엄령을 발표한 쁘라윳 찬오차 육군참모총장은 그 자리에서 호통을 쳤다. 회의에 참석한 정치인과 지도자들은 모두 곁에서 대기하던 군인들에게 붙잡혔다. 회의 장소였던 수도 방콕의 육군 클럽은 곧바로 쿠데타를 선언하는 기자회견장이 됐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다. 한때 전국에 내려졌던 야간 통행금지령도 걷혔다. 반년 동안 방콕에서 이어졌던 친정부·반정부 시위대의 대치도 사라졌다. 하지만 무력으로 권력을 잡은 군부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찾아볼 수 없다. 이따금씩 벌어지던 반쿠데타 시위도 힘을 잃었다. 친탁신계는 탄압을 피해 반군부 조직을 해외에 설립해야 했다. 태국 민주화 이후 19번째 쿠데타를 주도한 쁘라윳은 차기 국가지도자로 떠올랐다. 그것도 여론의 지지를 등에 업은 채 말이다.
군부 쿠데타를 일으킨 뒤 차기 태국 정권을 잡을 것으로 유력시되는 쁘라윳 찬오차 태국 육군참모총장이 6월 19일 방콕에서 열린 회의 자리에서 발언하고 있다. 방콕/AFP연합뉴스 |
“군부가 나라를 행복하게 만들고 있다”
군부의 통치기구 국가평화질서위원회(NCPO)는 일단 명목상 ‘사회 안정’은 이룬 듯 보인다. 쿠데타와 함께 대규모 시위와 충돌은 자취를 감췄다. 시위의 주무대였던 방콕 시민들은 시위가 조용해진 시내 모습을 반기고 있다. 방콕 시민 파리다 리는 “군부가 없었다면 싸움이 끊이질 않고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것이다. 군부는 이 나라를 행복하게 만들고 있다”고 가디언에 말했다. 수앗 두싯 라자밧 대학에서 6월 22일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 태국 국민 72.7%가 ‘나라 분위기가 평화로워졌다’고 응답했다.
국민들의 지지를 더욱 얻기 위한 ‘포퓰리즘’ 정책과 행사들도 눈에 띈다. 잉락 친나왓 정부로부터 받지 못한 쌀 수매금 때문에 시위를 벌였던 농민들을 위해 이 돈이 지급됐다. 정부의 쌀 수매 정책은 농민들이 탁신 친나왓 전 총리와 탁신계 정당을 지지하게 된 계기였다. 또한 국가 재정위기를 겪은 잉락에게 국민들이 등을 돌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이기도 했다.
205개 생필품의 가격을 11월까지 동결하고, 중계권자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해 가며 국민들에게 무료로 월드컵 경기 중계를 보여주기로 한 것도 모두 군부의 결정이었다. 한국 신군부의 ‘국풍 81’ 같은 선전전인 ‘국민에게 행복 돌려주기’도 열었다. 젊은 남성 군인들이 ‘난타’ 공연을 벌이고, 군복을 입은 여성 무용수들이 춤을 추는 무대는 모두 쁘라윳이 주도한 ‘행복 캠페인’의 일환이다.
6월 1일 태국 방콕에서 열린 반군부 시위에 참여한 남성이 쿠데타를 반대한다는 의미의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있다. 방콕 | AFP연합뉴스 |
그러나 군부는 동시에 반군부 여론을 막아버렸다. 군이 운영하는 방송을 제외한 수많은 방송을 금지시켰고, 5명 이상 모여 집회를 벌이면 체포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300명이 넘는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이 군부의 소환 명령을 받았고, 이 중에는 캄보디아 등 해외로 몸을 숨긴 이들도 있다. 방송과 신문, 인쇄매체, 그리고 인터넷까지 감시하기 위한 기구를 쿠데타 한 달이 넘은 6월 25일 또다시 만들었다. 결국 친탁신계 푸어타이당의 차루퐁 루앙수완 전 대표는 6월 24일 반군부 해외조직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자유 태국 조직’을 만들었다. 군부의 탄압을 우려해 정확한 위치는 밝히지 않았다.
일각에선 새로운 방식의 시위가 등장했다. 군부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통제에 익숙하지 않은 점을 이용, SNS를 통해 시위가 모의됐다. 때문에 쿠데타 이후 한동안 주말 방콕 시내에서 1000명 이상이 반정부 시위를 벌일 수 있었다. 군의 체포를 피하기 위해 음식점, 공공장소에서 기습적으로 모였다 흩어지는 플래시몹 형태로 바뀌었다. SNS를 타고 영화 <헝거 게임> 시리즈에서 가상 독재국가와 맞서 싸우는 주인공들이 했던 ‘세 손가락 경례’도 퍼졌다. ‘빅 브라더’를 다룬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길거리에서 선 채로 읽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학가에서 샌드위치를 팔면서 반군부 구호를 외치는 방법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시위는 주동자로 지목된 친탁신계 인사가 체포된 뒤로 시들해지고 말았다.
친탁신계에는 새 지도자감 안 보여
이번 쿠데타는 지난 2006년 쿠데타와 비교되곤 한다. 둘 다 탁신이 취임한 2011년 이후, 친탁신계와 반탁신계의 대립 속에 벌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쿠데타 양상은 2006년과는 조금 다르다. 2006년엔 탁신이 ‘공공의 적’이었다. 당시 군부에는 정계 은퇴를 선언해놓고 슬그머니 복귀한 탁신을 축출해야 한다는 명분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이들이 몰아낸 잉락은 탁신과 다르게 움직였다. 국가 재정을 파탄시키고, 자신의 친인척을 요직에 앉힌 인사 부정이 있긴 했지만, 잉락은 헌법재판소의 5월 7일 해임 결정을 즉시 받아들였다. 또 잉락은 국방장관까지 역임하며 군부를 지원하는 등 군부와 마찰을 일으키지 않았다. 시위가 6개월째 지속됐음에도 군부가 선뜻 나서지 못했던 이유다.
6월 26일 B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쿠데타는 사전 모의가 없었다”고 말한 찻차렘 차름숙 육군참모차장의 말도 언뜻 일리가 있어 보인다. 2006년 쿠데타는 7개월 전부터 모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미 대규모 시위로 타격을 받은 태국 경제가 쿠데타로 더 악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군부의 개입을 막았다.
군부가 반탁신계 민주당의 정권 창출을 돕지 않을 것 같다는 점도 2006년 쿠데타와의 차이점이다. 농민 다수의 지지를 확보한 친탁신계가 총선만 치르면 무조건 다수당이 됐기 때문이다. 아예 군부가 정치 전면에 나설 가능성도 보인다. 쿠데타 전후로 “권력에는 관심없다”고 수차례 주장해온 쁘라윳이 높은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쿠데타 한 달 뒤 발표된 여론조사에서 쁘라윳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를 확인할 수 있다. 태국 교육부 산하 국가개발행정연구원이 6월 22일 발표한 차기 총리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41.3%가 쁘라윳을 지목했다. 쁘라윳 외의 후보는 모두 응답률이 10% 미만이었다. 수앗 두싯 라자밧 대학의 설문조사에서는 군부의 통제에 대해 ‘모든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 NCPO가 집권했으면 좋겠다’는 응답이 65.4%나 됐다. AP통신은 미국 국무부 산하 동아시아태평양담당국의 고위 관계자인 스콧 마셜 부차관보가 “이번 쿠데타가 16개월 동안 지속된 지난 2006년 쿠데타보다 더 길어질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다고 전했다.
설문조사만으로 쁘라윳의 지지도를 속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만큼 쁘라윳에 대항할 이렇다 할 인물도 없는 상황이다. 정치 경험이 전무했던 잉락이 총리로 나선 것은 탁신의 동생이라는 후광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친탁신계의 새로운 지도자감이 없다는 뜻이다. 태국 내에서도 ‘왕당파’로 이름난 쁘라윳은 왕실의 지지도 쉽게 얻을 수 있다. 왕실 모독이 한국의 국가보안법 위반에 준하는 태국에서 왕실의 지지는 곧 절대적인 권력이다.
태국 군부는 늦어도 9월까지 새로운 과도정부를 구성할 것이라고 밝혔다. 공교롭게도 쁘라윳은 오는 9월 전역한다. 5·16 군사정변 이후 “민간에 권력을 이양하겠다”고 말한 뒤 전역 후 스스로 대통령이 된 박정희가 연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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