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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공화국의 어린이들이 6일(현지시간) 만델라의 저택과 가까운 요하네스버그에서 벌어진 추모 행렬 속에서 만델라의 얼굴이 그려진 그림과 함께 서 있다. 요하네스버그|AFP연합뉴스 |
“함바 칼레 마디바(잘 가요, 마디바).”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공화국 전 대통령의 타계 소식이 전해진 5일 요하네스버그에 있는 만델라 자택 앞에는 세계에서 온 취재진과 주민들이 몰려들었다. 제이콥 주마 남아공 대통령(71)이 만델라 타계 발표를 마치자마자, 집 앞에 모인 추모객들 사이에서 남아공 국가인 ‘은코시 시켈렐 이아프리카(신이여, 아프리카를 축복하소서)’ 1절이 흘러나왔다.
곧이어 인종과 나이를 불문한 사람들이 “만델라 만세” “마디바(만델라의 애칭)여 영원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아파르트헤이트(남아공의 인종 분리 정책) 반대 노래를 부르며 즉흥 추모 행사가 벌어졌다. 잠옷 차림에 담요를 두르고 거리에 나온 사람들까지 수백명이 합세하며 추모 분위기가 더해졌다. 자녀들과 함께 추모 대열에 합류한 어떤 부부는 “우리 아이들도 ‘이 나라의 아버지’를 기리는 이 순간을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남아공 현지 일간 메일앤드가디언에 전했다.
요하네스버그 중심가 샌튼의 만델라 동상 앞 광장에도 시민들이 모여 만델라를 추모하기 시작했다. AP통신은 “만델라 동상 앞에 만델라가 생전에 꿈꾸고 희생했던 ‘무지개 나라’를 상징하듯 흑인, 백인, 인도계 등 다양한 인종의 추모객들이 모였다”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한 추모객은 “어떤 이들은 만델라를 테러리스트라고 말했지만, 그는 자유와 평등의 상징”이라며 “가난하든 부유하든, 인종이 어떻든, 우리에게 모두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만델라를 존경한다”고 말했다.
만델라가 1960년대부터 살았던 소웨토의 옛 집에도 추모객들이 모였다. 이곳은 만델라가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서 흑인 차별 철폐 운동을 벌였던 근거지이기도 하다. 추모객들은 만델라가 이끌었던 집권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노란 티셔츠를 입고 조화를 손에 쥔 채 모였다. 어떤 추모객은 “그는 달려갈 길을 마치고 선한 싸움을 다싸웠다”는 성경구절을 인용해 만델라를 기렸다. 세살배기 아들과 14살 딸과 함께 밤새 함께 자리했던 또다른 조문객은 “우리는 12월 내내 우리의 아버지였던 만델라의 삶을 축하할 것이다”고 말했다.
남아공 국민들은 위대한 지도자의 죽음에 “나를 돌봐주던 아버지를 잃은 느낌이다” “만델라가 없어 이 나라의 인종 차별이 시작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며 슬픔과 걱정을 내비쳤다. 이 와중에도 만델라가 이제야 영원한 휴식에 들어가게 되자 시민들은 안도와 ‘축하’를 표현하기도 했다. 만델라가 이미 몇 년간 투병을 해왔고, 지난 6월 한 차례 위독한 고비를 넘긴 까닭에 국민들은 만델라를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를 해온 차였다. 남아공 특유의 추도 풍습에 따라 추모객 40여명이 원을 이뤄 돌면서 박수치며 노래 부르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응원도구로 알려진 부부젤라도 추모행렬에 다시 나타났다.
ANC는 사무총장 명의로 “큰 바오밥나무가 쓰러졌지만 그 뿌리는 남아 이 땅을 계속 비옥하게 만들 것”이라는 성명을 냈다. ANC는 “만델라는 남아공을 사랑했고, 남아공 뿐 아니라 세계 사람들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며 “마디바가 남아공의 자유를 위해 기울였던 모든 노력과 그의 웃음, 그가 췄던 자이브 춤까지 기억에 남을 것”이라며 애도했다.
백인정권의 마지막 대통령이었던 프레데릭 데클레르크(77)도 누구보다 앞서 추모 메시지를 전했다. 데클레르크는 “만델라는 입헌민주주의와 국가 건설에 굉장한 기여를 했다”며 “남아공은 건국의 아버지이자 ‘위대한 아들’을 잃었다”고 말했다. 데클레르크는 1990년 2월 옥중의 만델라와 만나 권력 이행 ‘담판’을 짓고 석방을 결정했던 인물이다. 1993년 만델라와 공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고, 만델라가 대통령에 오른 뒤에는 부통령을 지내며 흑백 공동정권을 이끌었다.
남아공의 정신적 지주로 불리는 데스몬드 투투 남아공 성공회 대주교(82)도 “태양은 내일도 떠오르겠지만 어제만큼 밝지는 못할 것”이라는 말로 추모의 뜻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