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격을 맞은 토라보라산 _ 위키피디아
- 주요 전황들을 단순히 정리하는 데 일단 주력했습니다만, 부족한 게 많을 것 같네요. 차차 사진이라도 더 구해서 올려놓으렵니다. (위 폭격 사진도 별로긴 한데, 군인들 쭉 늘어서 있는 사진도 보기 싫어서 사람 없는 사진을 올려봅니다)
1996년
8월, 수단에서 쫓겨나게 된 오사마 빈 라덴은 그 근거지를 아프가니스탄 잘랄라바드로 옮긴다. 물라 오마르와 친분이 있던 빈 라덴은 그 때부터 알 카에다는 동부 아프가니스탄을 근거지로 삼게 된다. 알 카에다는 1980년대 후반 빈라덴이 만든 조직으로, 소련에 대항하는 무자헤딘(이슬람 전사)를 지원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2001년 9.11. 테러 이전 알 카에다의 캠프를 거쳐간 이들은 1만~2만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당시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하던 탈레반 정권을 지원했다.
1998년
탄자니아와 케냐에서 벌어진 미국 대사관 폭탄 테러 주동자로 빈 라덴이 지목됐다.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알 카에다 근거지에 미사일 공격을 명령했다. 탈레반 정권에는 빈 라덴을 넘겨주라고 요구했다. 그 이후 아프가니스탄에 관심을 끊었던 미국은 아프가니스탄과 빈 라덴을 주목하게 된다. 이전 소련의 침공 당시에는 무자헤딘 세력에게 무기까지 지원했던 미국이었다.
이즈음 아흐메드 샤 마수드라는 인물이 떠오른다. 극단적인 이슬람 근본주의 활동을 벌인 탈레반 정권과 알 카에다에 대항하는 활동을 하던 인물이다. 유럽 의회에도 여러 아프간 지도자들을 이끌고 등장해, "탈레반과 알 카에다가 이슬람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갖게 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탈레반 정권의 활동에는 파키스탄과 오사마 빈 라덴의 지원이 있다고도 덧붙였다. 국내에서는 지역 지도자들과 대화했다. (당시 지도자들 중엔 하미드 카르자이 현 대통령도 있었다.) 그러나 마수드는 2001년 9월9일, 자살폭탄 테러를 당해 숨졌다.
2001년
9.11.테러가 벌어졌다. 아프간은 "누가 배후에 있든 테러 공격을 규탄한다"고 말했다. 파키스탄주재 아프간 대사는 13일 "빈 라덴이 테러 공격에 가담한 명확한 증거가 있다면 그를 송환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오사마 빈 라덴은 그해 9월 계속해서 테러 관여를 부인했다. (2004년 빈 라덴은 테러를 자행했다고 시인했다.)
미국은 아프간의 탈레반 정권에 빈 라덴을 송환하고 알 카에다 기지를 공격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아프간은 미국과의 성전을 치를 것을 주장했다. 미국이 빈 라덴의 테러 가담을 입증할 증거를 내놓아야 한다고도 했다. 미국은 곧 중거를 파키스탄에 공유했고, 파키스탄 측은 아프간 탈레반 정권과의 중재를 시도했다. 그러나 미국도, 아프간도 대화에 나설 뜻은 없어보였다. 아프간은 증거를 제시하라고 했고, 미국은 탈레반과의 협상은 불가하다는 입장만 거듭했다. 도널드 럼스펠드는 "아프간 동굴 속 테러리스트 수백명을 찾아내겠다"고 말했다. (미국이 '대면 협상을 원칙으로 하는' 탈레반에 대해 잘 인지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비슷한 시기 미 의회는 대테러 군사력 승인 법을 통과시켰다. 9.11. 테러 가담자들은 미군이 공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탈레반 정권을 이미 테러 집단으로 보고, 제네바 헌장을 적용할 대상이 아닌 것으로 판단했다. 이런 판단은 유엔 헌장 등과도 맞지 않는 것이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도 미국의 군사력 사용을 승인하지 않았다. 미국이 자의적 판단으로 군사력을 사용했다는 지적들이 나왔다.
10월7일부터 전쟁은 시작됐다. 수도 카불과 칸다하르, 잘랄라바드 등지에서 공습이 이어졌다. CIA도 육상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조지 W 부시와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공격 사실을 알렸다. 탈레반 군사 시설과 테러리스트 양성소가 공격 대상이 될 것이며, 아프간 사람들을 위해 식량과 의료품들을 투하하겠다고도 했다. 미국 영국은 곧 탈레반 정권에 반대한 '북부 동맹'과 함께했다. 11월에는 알 카에다의 3인자인 모하메드 아테프를 폭탄 공격으로 사살했다.
미국의 공습에 탈레반은 우왕좌왕했다. 이와 같은 대규모 공습을 겪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군과 북부동맹간의 움직임이 조금씩 엇갈리기 시작했다. 애초 목적이 조금씩 달랐다. 미국의 목표는 빈 라덴을 찾는 것이었고, 북부 동맹의 목표는 탈레반 정권 전복이었다. 미군의 공습이 주요 시설 파괴에만 집중되다보니, 북부 동맹은 탈레반+알 카에다와의 전투를 벌이는 데 공습을 지원하라고 요청했다.
마자리샤리프-카불-쿤두즈, 그리고 산악 요새가 있던 토라보라산까지 전투가 이어졌다. 12월17일 토라보라산의 마지막 동굴 요새가 발견됐다. 그러나 빈 라덴과 알 카에다 지도부는 이미 파키스탄으로 몸을 숨긴 뒤였다.
2002년
하미드 카르자이를 수장으로 하는 새 정부 구성이 원로 회의 격인 '로야 지르가' 이후 나왔다. 미 공군은 카불 북쪽 바그람에 공군기지를 세웠다. 동부에는 탈레반과 알 카에다 잔존 세력을 잡기 위한 전진기지가 생겼다. 반면 알 카에다도 동부 팍티아주의 샤히콧산을 기점으로 재규합했다. 탈레반엔 물라 사이푸르 레흐만이 세력 재건에 나서 3월엔 병력규모가 1000명이 넘었다.
미군과 (탈레반이 아닌)아프간군은 3월2일부터 '아나콘다 작전'을 시작한다. 소련에 맞섰던 것처럼 무자헤딘은 소형 로켓, 수류탄 등을 들고 산과 벙커에 숨었다. 고도는 3000미터가량 됐다. 그들은 "치고 빠지기" 전략을 주로 썼다. 미군은 처음엔 은거지가 200여곳, 게릴라 병력은 1000~5000명 정도로 파악했다. 3월6일까지 미군 8명, 아프간 군 7명, 무자헤딘 400여명이 숨졌다는 발표가 나왔다. 호주, 캐나다, 독일, 뉴질랜드, 노르웨이의 특수부대도 무자헤딘 소탕에 나섰다.
아나콘다 작전 이후 알 카에다는 그해 여름 파키스탄에서 다시 규합했다. "치고 빠지기"는 이제 아프간의 벙커가 아닌 파키스탄을 거점으로 이뤄졌다. 반면 탈레반은 남부 칸다하르, 자블, 헬만드, 우루즈간두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해 미군은 산악전에 능한 영국 해병까지 파병을 요청했고, 탈레반은 동굴과 터널, 국경 넘어 파키스탄까지 숨었다.
2002년 활발히 벌어졌던 대 탈레반-알카에다 작전이 끝나자 탈레반 잔존세력은 다시 공격을 대비해 세를 모으기 시작했다. 아프간 파슈툰주를 중심으로 탈레반의 '성전(지하드)' 참여에 대한 모병'이 시작됐다. 소규모 훈련캠프들이 꾸려졌다. 200명 정도가 모였던 캠프는 일개 종족 규모까지 커졌다.
탈레반은 공격 작전을 구체화했다. 한 전진기지에 50명 규모의 게릴라 그룹이 달라붙은 뒤, 5~10명 규모로 다시 분리하는 형식이었다. 모함메드 오마르는 자신을 지도자로 한 10인 지도위원회를 구성했다. 탈레반과 알카에다의 '작전 분할'도 이뤄졌다. 2003년 여름들어 공격은 점차 잦아졌다. 미군과 아프간 정부군뿐 아니라 비정부기구(NGO)의 인권 운동가들도 공격 대상이 됐다. 이 시기 탈레반은 자불주에서 정규군을 구성하기에 이른다.
2005년
미군의 공습 이후 아프간 정부는 탈레반 지역으로 진격하는 데 성공했다.
2006년
나토 산하 국제안보지원군(ISAF-2001년 12월 유엔 안보리에 의해 출범, 2003년 8월 나토가 작전권 이양, 미국 등 46개국 참여)이 미군을 아프간 남부에 재배치하기 시작했다. 나토는 남부지역 재건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남부지역에는 동시에 대규모 폭력사태가 잇따른다. 탈레반 정권이 물러난 이후 최대규모였다. 나토는 적지 않은 전과를 거두지만 탈레반을 격퇴하진 못한다.
2002년쯤 최대 5000명 정도로 추산되던 탈레반의 규모는 2007년 1만명 정도까지 늘어난다. 2000~3000명은 정규군이고, 나머지는 용병 등 '파트타임'으로 추산됐다. 아프간이 아닌 파키스탄, 우즈벡부터 터키와 중국 서부 지역 등 다양한 참전 지원자들이 폭탄 제조기술 등을 들고 찾아왔다. 2007년 미군의 사상자는 100명 이상이었는데, 참전 이후 최대규모였다.
2008년
2007년에도 3500명을 추가 파병한 미국의 마이클 뮬렌 당시 합참의장은 2008년 "1만명을 추가 파병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미국의 우선순위가 길게 끌어온 아프간이 아닌 이라크 전쟁이라면 따르겠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아프간 추가 파병은 진행됐다. 전년까지 2만6607명이던 미군 파병 규모는 2008년 6월 4만8250명이 됐다. 고든 브라운 당시 영국 총리도 추가 파병에 나섰다. 그해 6월 탈레반은 칸다하르 감옥을 공격해 수감자 1200명을 풀었다. 400명은 아프간 전쟁 포로였다. 7월엔 탈레반 사량관을 표적 삼은 공습이 벌어졌지만, 시민 90명이 숨졌다.
9월 들어 전쟁은 파키스탄 영토까지 번졌다. 미군 공수부대로 추정되는 병력이 7~20명 정도를 사살했는데, 지역에 살던 일반 시민이 숨졌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파키스탄 정부는 "파키스탄 영토 침범"이라며 비난했다. 2008년 9월 미군의 사망자수는 113명을 기록하면서, 다시 연 최대사망자수 기록을 경신했다. 영국도 2008년에 108명이 숨졌다. 탈레반은 나토에 전쟁물자와 자금을 공급하는 통로를 공격했다.
2008년 부시 대통령이 파키스탄까지 공격 대상을 넓히라는 비밀 지시를 내렸다고 BBC가 미 국방부 익명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아프간 전쟁의 불똥이 파키스탄까지 튀었다. 파키스탄은 외국군의 자국 영토 진입을 허락하지 않은 상태였다. 파키스탄군은 탈레반 등을 쫓기 위해 국경을 넘는 미군에 발포 명령을 내렸다고 밝혔다. 그해 9월 파키스탄군은 ISAF 헬기를 공격했다. 미 국방부는 헬기가 아프간 영공에 있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반면 파키스탄군은 "공격이 아닌 경고사격이었고, 헬기는 아프간 영공에 있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후 미군은 파키스탄을 더 넘나들었다. 파키스탄 북부 카이베르 팍슈툰와주까지 작전 범위를 넓히기도 했다. 무인기(드론) 공격은 더욱 빈번해졌다. 2009년초, 2006년 이래 드론 공격은 183% 증가했다.
2008년 말, 탈레반은 알 카에다와 여전히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군은 알 카에다 조직원 100여명이 아프간에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파키스탄은 ISAF 등 해외군이 아프간에만 주둔하고, 파키스탄 영토로는 넘어오지 말라고 당부했다. 해외 파병 규모가 10만명인데 반해 파키스탄은 자국 국경에14만명을 파견했다는 점도 강조했다.
2009년
파키스탄을 통해 아프간으로 물자를 조달하려는 통로를 공격당할 위기에 놓이자, 러시아와 중앙아시아를 통해 아프간으로 군수물자를 조달하려는 NDN(Northern Distribution Network)가 설립된다. 라트비아 리가, 조지아 포티,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등에 물자가 도착하면 육로 등으로 우즈벡을 거쳐 아프간으로 물자를 공급하는 방식이었다. 물자 공급루트는 파키스탄의 카이베르 지역 대신 NDN으로 바뀌었다. 물론 파키스탄도 여전히 물자 공급처였다. 우즈베키스탄은 자국의 나보이에 있는 공항을 사용하라고 했다. 미국이 우즈벡과 사이가 좋지 않아 거절했지만, 한국은 대한항공편을 이용해 나보이 공항에 물자를 자주 조달했다고 한다.하지만 결국 미국은 우즈벡 나보이를 이용하게 된다. 인권단체들이 우즈벡의 인권탄압을 들어 미국 정부가 우즈벡과 협력하면 안된다고 염려했다.
1월, 로가르주와 와르다크주에 미군 3000며이 추가 투입된다. 2월엔 해병여단 3500명을 포함해, 2개 여단 1만7000명이 추가 투입된다.그럼에도 미군 맥키에르넌 장군은 3만명 추가투입을 요청한다. 9월엔 당시 새로운 미군 아프간사령관이던 맥크리스털 장군이 향후 효과적인 작전 수행을 위해선 50만 병력과 5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요구한다. 하지만 11월, 아프간내의 부패와 실정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탈레반이 다시 득세하게 되고, 이 때 미군 증파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우려한다.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 것이란 우려도 나오기 시작한다.
10월26일,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이 탈레반과 직접 평화협상을 하기로 한다. 오바마 행정부는 이에 늘 반대해왔다. 오바마 정부가 12월1일에 3만명 추가 파병을 선언하자, 미국내 반전단체들은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2009년 9월4일에는 쿤두즈 공습도 있었다. 탈레반이 쿤두즈 남서부 지방에서 주민들의 트럭을 납치하자, 나토군이 해당 지역에 공습을 벌인 것이다. 이 때 179명이 숨졌는데, 일반 시민은 100명이 넘었다.
6월25일에는 미 해병 1개 여단 4000명과 아프간군 650명을 투입해 칸자르 작전을 벌이기로 한다. 미 해병은 2004년 이라크 팔루자 공격 이후 최대 규모의 작전을 벌인 것이다. 영국군은 ISAF의 오랜 주둔을 위해 '표범의 발톱' 작전을 벌이기도 한다. 군은 헬만드에 침투, 시민들을 먼저 보호했지만, 가장 큰 목적은 군사적 거점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12월22일, 미국 고위 정보당국자인 마이클 플린 장군은, "탈레반은 지지기반을 확보하고 있으며, 정당성 확보, 군사적 능력을 강화도 하고 있다"고 브리핑했다. 2010년에는 안보문제가 더 심각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실제 탈레반의 움직임은 점차 거세지고 있었다. 당시 탈레반의 규모는 2만5000명으로 파악되고 있었다.
(2002년 1000명, 2007년에 1만명, 이제 탈레반은 9.11. 테러 이전 수준의 규모를 회복했다.) 맥크리스털 장군은 탈레반이 매우 위험한 적이며, 아프간 시민들을 보호하는 것이 중점이라고 밝혔다. 탈레반은 2009년135건의 공격을 가했다고 주장했는데, 보도는 잘 이뤄지지 않았다. 이 때는 아프간 대선이 있던 때다. 탈레반이 득세하던 남부지역은 투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들 했다. 해외 선거 감시단들도 남부 지역에 진입하지 못했다. 탈레반은 12월, CIA가 무인기 공격의 전초기지로 삼은 차프먼 기지를 공격했다. CIA 요원 6명이 숨졌다.
2010년
미군이 평화유지를 위해 파키스탄에 등장하면 주민들이 돌을 던지며 반기지 않는 상황이 됐다. 미군은 파키스탄이 남와지리스탄에 군사적 행동을 하는 것에 감사를 표했다.파키스탄은 8년간 350억달러를 군사작전에 투입했다고 밝혔다.
아프간 정부는 2010년 한 해동안 탈레반이 900명을 사살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IED 폭발물을 사용하다 사고가 발생하는 등 미군의 사망자도 이해 늘었다. 나토는 2010년 탈레반 사살 작전에 집중하겠다고 했다. 2010년은 전쟁 이후 가장 많은 반란 공격이 벌어진 해로 기록된다. (1500건) 미군은 약 3만명을 추가투입했고, 이라크전 참전 군 숫자를 넘어서게 됐다.CIA도 파키스탄 내 알카에다 진압을 위한 헬파이어 미사일 발사 작전 등을 벌였다. 드론 공격도 115차례 벌어졌다. 2009년의 50회보다 두 배 이상 늘었다. CIA는 활동범위를 아프간에서 파키스탄으로 점차 넓혀나갔다. 2010년 9월에 공습이 700회 벌어졌는데, 이는 2009년 한 해 동안의 257건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2010년은 위키리크스가 아프간 전쟁 관련 기밀문서 9만1371건을 공개한 행기도 하다. 연합군의 공격으로 숨진 민간인 숫자가 드러났다. 쿤두즈 공습으로 숨진 민간인 수도 이 때 드러났다. 또 파키스탄 정보국(ISI)이 탈레반과 긴밀한 관계였음도 드러났다.
9월에 파키스탄군의 사상 소식이 들리자, 미국과 파키스탄간의 관계가 악화된다. 미군은 탈레반을 소탕하겠다면서 국경 기지 두 곳을 공격하기도 했다. 파키스탄은 나토군에게 들어오는 보급로를 차단해버렸다. 파키스탄군은 나토 호송차량을 공격해 운전자 여럿과 유조차량 100여를 파괴했다.
2011년
탈레반이 칸다하르의 정부건물을 5월7일 공격했다. 경찰서 3곳, 학교 2곳과 시장사무실도 공격당했다. 탈레반 정부 전복 이후 가장 큰 규모의 공격이었다. 이 일이 있기 5일전인 5월2일, 미국은 오사마 빈 라덴 사살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6월22일, 오바마는 2011년에 1만명, 2012년에 2만3000명을 철군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7월엔 캐나다가 전투 병력을 철수시켰다. 나토 가입국들도 서서히 철군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영국-프랑스-벨기에-노르웨이 등이 점차 철군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11월26일, ISAF군이 파키스탄군을 공격해 병사 24명이 숨졌다. 나토는 라스무센이 "의도된 공격이 아니었다"고 했지만 파키스탄은 또다시 나토의 공급로를 닫아버렸다.
이해 말, 과거 북부동맹의 하부 군사조직의 부활로 일컬어지는 '아프간 국민 전선'이 창설됐다. 압둘라 압둘라를 중심으로 아프간국가연합이라는 정치 단체가 생겼다. 아프간 의회에선 야당 역할이었다. 반탈레반 시위를 주도한 '아프간녹색트렌드'라는 정치 운동도 벌어졌다.
2012년
5월, 미 의회 의원들과 국민 전선은 "앞으로 탈레반과의 협상이 필요하면 진행할 수 있지만, 미국과 국제사회의 도움을 받은 아프간인들에게 탈레반과 알카에다는 패했다"는 내용의 '국민전선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다.
미군이 아프간에서 공격을 벌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자, ISAF와 아프간 사이의 균열이 생겼다. 미군이 아프간인들과 문화를 전혀 존중하지 않고 있다는 문제가 다시 제기됐다. 아프간군에 미사일 공격하기 전의 모습, 죽은 시체들 옆에서 포즈를 잡고 찍은 사진들이 공개되고 난 뒤다.
그러다 5월2일, 카르자이와 오바마는 양국간 전략적 동반자 협정에 서명한다. 딱 빈 라덴 사살 1년이 된 때였다. 미군 철군 뒤 양국의 협력 방안에 대한 내용들이었다. 7월 카르자이와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만난 뒤로, 아프간은 나토 이외의 미국의 최대 동맹국으로 지정됐다. 11월에는 상호 안보협정에 대한 협상도 벌였다.
5월12일,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에서, 나토 회원국들의 '출구전략'이 논의됐다. 2013년 중반까지 전투병력 들은, 아프간 지원 및 훈련으로 대체하겠다는 내용이었으며, 2014년 12월까지 13만명 중 대부분을 철군하겠다는 내용이 논의됐다.
2013년
오바마는 2012년, 나토군을 2013년에는 철군하겠다고 카르자이와 합의했다. 또 아프간 죄수들을 아프간 정부에 돌려보내고, 2013년 봄까지 민간인 마을에서 미군을 철수하겠다고 했다. 아프간군이 아프간인들을 직접 책임져야 한다는 뜻이었다. 2013년에 아프간 군 규모는 35만명 수준까지 늘기는 했다.
11월20일, 양국간 상호 안보협정 체결에 합의했다. 승인된다면, 미군은 아프간군을 훈련시키기 위한 군사 자문단을 투입하기로 했다. 알카에다 등 무장단체에 대한 대테러작전을 위한 미국 특수군도 파병하기로 했다.
그 와중에도 탈레반의 자살폭탄공격 등은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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