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씨드림 종자은행 대표 안완식 박사
“몸을 움직일 힘이 남아 있는데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을 수가 있나. 토종 종자들이 사라지고 있는데….”
경기 화성에서 ‘씨드림 종자은행’을 운영하고 있는 씨드림 대표 안완식 박사(74·사진)에게 토종 종자와의 인연은 운명과도 같다. 조부가 지어준 이름도 ‘완전할 완(完)’에 ‘심을 식(植)’자이다. 이름이 빚은 운명인지 안 박사는 서울대 농과대학에 입학했고 강원대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9년 농촌진흥청에 연구원으로 들어가 유전자원과가 생기기 이전부터 유전자 연구를 도맡아 했다. 2002년 정년퇴임 전까지도 주로 토종 종자를 연구했다. 퇴임 후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우리 종자> 등을 집필하며 ‘씨앗 박사’라는 명성을 얻었다.
점점 사라지는 토종 종자를 지켜야겠다는 마음으로 2008년에 토종종자모임 씨드림을 만들었다. 이후 전국을 돌아다니며 본격적으로 토종 종자를 모으기 시작했다. 해마다 방문할 지역을 시·군 단위로 정하고 뜻이 맞는 동료들과 한 팀을 이뤄 방문 지역 농가를 일일이 찾아다녔다. 안 박사는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니 주민들로부터 교회 전도사나 약장수라는 오해를 받은 적도 있다”면서 “오랜 기간 토종 종자를 수집하러 다녀 이제는 ‘어느 집에 가면 어떤 토종 종자를 받을 수 있겠구나’ 하는 감이 생겼다”며 웃었다.
안 박사는 지금까지 토종 종자 3900여종을 모았다. 종자들은 기증자와 기증 시기, 품종명 등 정보를 적은 종이봉투에 담아 ‘씨드림 종자은행’ 속 냉장고에 보관하고 있다. 이 종자들은 씨드림 회원들에게 나눠주거나 농진청 유전자원센터에 기증한다.
씨드림 인터넷 카페를 방문하고 종자 종류를 컴퓨터 파일로 정리하는 것도 안 박사의 중요한 일과다.
강화도에서 찾지 못한 분홍감자 종자를 지난해 찾았을 때의 감격을 잊을 수가 없다. 한국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배추·무 종자를 찾았던 순간도 아직 생생하다. 안 박사는 분홍감자 종자를 건네준 할머니가 어찌나 반갑고 고마웠는지 와락 껴안았다고 한다. 그는 “지금까지 모은 종자들 중 귀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며 마치 토종 종자를 자식처럼 여겼다. 갈수록 종자의 가치를 돈으로만 따지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안 박사는 “언제까지 현장에서 활동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토종 종자 수집에 모든 에너지를 쏟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의욕만으로 모든 일이 척척 풀리는 것은 아니다. 당장 재정 문제로 씨드림의 활동이 쉽지 않다. 안 박사와 팀을 이룬 씨드림 회원들은 1년 중 약 5개월간 종자 수집을 하러 다닌다. 식비와 자동차 기름값만 따져도 최소 2000여만원이 든다. 방문 지역 지자체로부터 지원금을 받고 있지만 모자란 부분을 사비로 채울 때가 많다.
씨드림의 새 보금자리를 찾아야 하는 것도 큰 고민이다. 씨드림은 화성의 토지를 임차해 현재의 텃밭과 비닐하우스를 세웠다. 종자를 보관 중인 종자은행은 컨테이너 박스 안에 마련돼 있다. 임차 계약 기간이 이미 끝나 수원시 광교신도시 인근 토지로 이전해야 하는데, 그곳에서 종자를 보관할 컨테이너 박스를 설치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안 박사는 “정부가 토종 종자 연구를 지원하겠다고 밝히긴 했지만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인다”며 “공공 연구기관도 토지나 예산을 확보할 힘이 없다. 정부나 지자체가 안정적인 연구 기반을 지원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화성 | 윤승민 기자 me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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