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챠 <창백한 얼굴들>

‘오마주’는 주말에 볼 만한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콘텐츠를 추천하는 코너입니다. 매주 토요일 오전 찾아옵니다.

지난달 27일 일본 소설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부고가 전해졌습니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서 찾을 수 있는 그의 흔적을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의 대표작인 추리 소설 <용의자 X의 헌신>은 동명의 일본 영화로도, 한국 영화(<용의자 X>), 인도 영화(<자네 잔 : 용의자 X>)로도 각각 리메이크됐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소설이 사랑받았고, 일본을 중심으로 여러 드라마·영화로도 제작이 됐습니다.
생각은 하루 만에 바뀌었습니다. 지난달 28일, 허범욱 감독의 별세 소식이 전해지면서요. 그는 8월5일 장편 애니메이션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 개봉을 앞두고 있었는데, 지난달 23일 발생한 화재 사고 이후 향년 43세로 숨을 거뒀습니다. ‘영화 데이터가 들어있는 노트북을 꼭 껴안고 있었다’는 증언들까지 알려지며 안타까움을 더했습니다. 대중에 널리 알려진 히가시노 원작의 작품보다, 신작 개봉을 앞두고 유명을 달리한 허 감독의 작품을 찾아보고 소개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크게 들었습니다.
왓챠에 그의 첫 장편 애니메이션 <창백한 얼굴들>(2014)이 남아있습니다. 유튜브나 쿠팡플레이에서도 별도 구매 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2015년 홀랜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장편 경쟁 부문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1년 전 같은 부문 수상작이 연상호 감독의 <사이비>였습니다.

제목처럼 ‘창백한 얼굴들’이 여럿 등장합니다. 정작 주인공 ‘민재’의 피부는 까무잡잡합니다. 부모도 모두 흰 얼굴이었던 터라 피부가 다른 이유를 알기 어렵습니다. 민재는 피부색 때문에 놀림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괴물’로 불립니다. 부모로부터도 사랑받지 못하고 폭행을 당하며 자랐습니다.
민재는 많은 사람을 죽였고, 마을 사람들부터 경찰까지 거액의 현상금이 걸린 민재를 체포하거나 죽이려 합니다. 민재가 먼저 사람들을 죽였는지, 사람들이 먼저 민재를 죽이려했는지는 과거가 자세히 묘사되지 않아 알기 어렵습니다. “우리 별에 색깔 있는 놈도 있구나”는 대사를 통해 민재의 외양이 발단이라 짐작할 수 있을 뿐이죠.

민재는 총을 겨눈 경찰 둘을 맞닥뜨립니다. 하지만 암살단이 그 경찰들을 쏴 죽이고는 민재를 데려갑니다. “왜 죽이지 않느냐”는 민재에게 암살단 두목은 “나 그런 사람 아니”라며 손을 내밀고는, 경찰의 추격에서 보호해주겠다는 듯 데려갑니다. 하지만 암살단도 민재를 잘 써먹고 여차하면 버리려는 마음을 숨기지 않습니다.
민재는 흰 얼굴들만 사는 행성을 어떻게든 벗어나면 자신도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암살단 두목부터 부하인 동료까지, 민재를 도와주겠다고 말하고는 뒤통수를 칩니다. 민재는 주변 사람들, 경찰의 추격을 피하며 행성을 떠날 수 있는 로켓 발사대에 다다릅니다.

극의 분위기 또한 창백합니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주인공의 상황 때문이기도 하지만, 극 중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도 상황도 썩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민재에게 걸린 현상금에 목을 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작품에선 모든 배경과 민재 외의 사람들은 모두 무채색으로 표현했습니다. 민재의 까무잡잡한 피부, 그가 흘리는 새빨간 피는 더 강렬하게 표현됩니다. ‘청소년 관람불가’ 수위에 맞는 장면들도 등장합니다. 다만 사람에 따라 느끼는 잔인함의 정도는 다를 수도 있겠습니다.
무언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집단에서 배척되는 주인공, 그를 향한 다수의 광기 등, 12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타자에게 배타적인 사회의 모습은 익숙합니다. 그래서 극은 단조로우면서도, 서글프게 느껴집니다. 허 감독의 최신작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는 살처분 위기에서 벗어난 뒤 ‘인간이 되고픈 돼지’와 주변의 괴롭힘에서 벗어나기 위해 ‘짐승이 되려는 사람’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소수자로 받는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려는 <창백한 얼굴들> 속 민재의 모습이 겹쳐질 것 같습니다.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의 개봉일은 추후 결정된다고 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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