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놈 옆에 더 나쁜 놈’ 구도 코믹극 인기
‘아파트’서 장충금 100억 노리고
‘강회장’선 돈으로 뺑소니 무마
‘멋진 신세계’엔 조선 악녀 등장
권력 가까운 ‘진짜 빌런’과 비교
코믹한 전개로 친밀감 부여
점점 센 캐릭터에 “악인 미화” 우려도

‘뇌물 100억원을 마련하기 위해 아파트의 100억원대 임자 없는 돈을 강탈하려는 전직 조직폭력배’.
뉴스 속 주인공 같은 이 인물은 설정만 놓고 보면 드라마 속 주인공의 앞길을 가로막는 빌런(악인)일 것 같다. 그러나 이는 JTBC 드라마 <아파트>의 주인공 ‘박해강’(지성)의 배경을 요약한 것이다. 박해강은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무역회사 간판을 걸고 불법 도박장을 운영한다. 수사 무마를 위해 정기적으로 뇌물을 바치던 고위 경찰관이 갑자기 100억원을 요구한다. 박해강이 거부하자, 경찰은 도박장을 털고 그의 큰 형님 ‘박용만’(정진영)을 구속한다. 100억원을 마련하려 골몰하던 박해강은 도박장에 빚을 진 이들을 추심하다 아파트 장기수선충당금(장충금)의 존재와, 자신이 사는 고급 대단지에 쌓인 장충금의 액수가 178억여원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박해강은 장충금을 노리고 아파트 입주민대표회의 회장 자리에 출마한다. 그는 회장이 되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만, 웃음을 유발하며 주민들의 마음을 얻기도 하는, 미워할 수만은 없는 캐릭터다.
최근 <아파트>와 같이 악인 주인공을 앞세운 코믹극이 안방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아파트> 직전 방영된 JTBC <신입사원 강회장>의 주인공인 대기업 회장 ‘강용호’(손현주)는 자녀들의 뺑소니 사고를 숨겨주고, 사고 탓에 축구 선수 인생이 끝난 피해자 ‘황준현’(이준영)의 사과 요구에 ‘얼마를 원하냐’고 대꾸하는 냉혈한이다. 인기리에 종영한 SBS <멋진 신세계>는 장희빈을 연상시키는 조선의 악녀 ‘강단심’(임지연)과 무자비한 재벌 총수 손자 ‘차세계’(허남준)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신입사원 강회장>과 <멋진 신세계>는 최근 드라마들이 기록하기 쉽지 않은 최고 시청률 10%대를 달성했다.

이들의 서사는 ‘더 나쁜’ 상대역 덕에 설득력을 얻는다. <아파트>에서는 박해강과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건설사 회장 ‘이충원’(박병은)이 있다. 이충원은 정·관계 고위급 인사와 사적 모임을 하며, 자신의 이권이 걸린 지역을 신도시로 지정하도록 장관·국회의원을 협박하는 뒷세계 거물이다.
경찰 또한 주인공 못지않은 악인이다. 경찰이 박해강에게 요구한 100억원은 사실 경찰청장이 이충원의 사모임에 가입하기 위해 내야 하는 돈의 액수다. 경찰청장에게 잘 보이고픈 경찰 고위 관계자가 박해강을 쥐어짠 것이다.
<신입사원 강회장>에서도 강용호의 회사를 물려받으려 악행까지 불사하는 이란성 쌍둥이 남매 ‘강재경’(전혜진)과 ‘강재성’(진구)이 등장한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전생과 현생에서 주인공들을 궁지에 몰아넣는 재벌 총수 조카 ‘최문도’(장승조)가 있었다. 권력과 더 가깝거나 주인공보다 더한 짓을 벌이는 ‘나쁜 놈보다 더 나쁜 놈’ 덕에 주인공의 악행은 상대적으로 가려진다.

인물의 구도와 함께 코믹한 전개가 주인공에게 친밀감을 부여한다. 박해강은 동네 주민들에게 친근한 이미지를 얻으려고 부하 3명을 가족으로 위장한다. 이들은 박해강이 회장 선거를 치르는 동안 여러 실수를 저지르며 극에 웃음을 더하고 분위기를 가볍게 만든다. <신입사원 강회장>에서는 70대 강용호의 영혼이 들어온 20대 황준현의 ‘인생 2회 차’식 노회한 말과 행동이, <멋진 신세계>는 예스러운 말투의 강단심과 연애에 서툰 차세계의 ‘밀당’이 웃음을 자아냈다.
조폭 영화 바람이 불었던 2000년대 초반에도 ‘악인 미화’ 논란은 있었다. 다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의 일상화로 방송 드라마까지 자극적인 인물상을 그리는 데 대한 우려도 제기된다. 공희정 드라마 평론가는 “매체가 다양해지고 작품이 늘어나면서 단순한 설정의 악인에는 재미를 느끼거나 몰입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며 “센 캐릭터를 설정하고 굳이 ‘착해지는 과정’을 넣지 않는 식의 극 전개가 많아지고 있다. 악인의 서사가 너무 미화되는 게 아닌가 우려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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