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개최되는 전시 ‘김창열’ 전경. 1950~1960년대 그림과 설치 작품 ‘Ceremony’(1993·2025 재제작)가 전시돼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물방울 작가’ 김창열(1929~2021)의 물방울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22일 개막하는 전시 ‘김창열’은 김창열의 작고 후 국공립미술관에서 처음 열리는 회고전이다. 김창열의 회고전으로도 최대 규모로, 작품 120여점이 출품됐다. 특히 작품 31점은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큰 명성을 안겨주며 평생 천착해 온 물방울을 김창열이 그리게 된 배경이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여정이기도 하다. 그는 1970년대 초 프랑스 파리에서 그린 물방울 그림을 통해 평단에 이름을 알리게 됐는데, 그전에 그가 그렸던 여러 작품들을 통해 물방울의 탄생 배경을 찾을 수 있다.

파리에서부터 김창열의 삶을 거꾸로 되짚어보자. 그는 1965년 김환기의 권유로 미국 록펠러재단의 지원을 받아 뉴욕에서 작업했다. 1950년대 한국에서 현대미술가협회 창립을 주도하고 앵포르멜(비정형 미술) 운동을 벌였고, 1961년 파리·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등에 출품하며 세계 무대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기에 가능했다.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난 김창열은 해방 즈음 월남해 서울대에서 미술을 공부했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해 학업을 멈춰야 했다.

한국전쟁과 뉴욕에서의 삶은 물방울에 천착하기 전 김창열의 미술 세계를 이루는 중요한 열쇳말이다. 한국전쟁에서 주변인들이 목숨을 잃었던 경험은 김창열이 상처를 형상화한 듯 거친 형태와 질감의 선을 화폭에 그려내게 했다. 이 시기 김창열의 작품명 중엔 ‘제사’가 많은데, 전쟁으로 숨진 이들을 그림으로 위로하려 한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전시된 김창열의 ‘구성’(1970·왼쪽)과 ‘별의 똥’(1969). 윤승민 기자

 

뉴욕에서는 김창열의 그림이 바뀐다. 매끈한 기하학적 추상화가 때로는 착시를 일으키며 그려진다. 이런 변화는 프랑스식 예술 사조를 따랐던 그의 그림이 미국에서는 인정받지 못했던 상황도 영향을 미쳤다. 작품에는 스프레이나 스텐실 기법도 쓰였는데, 이는 록펠러재단 지원금만으로 생활을 이어가기는 벅찼던 그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넥타이 공장을 다녔기 때문에 배운 기술이다. 김창열은 뉴욕에서의 시간을 ‘한국전쟁만큼이나 힘겨운 기억’으로 회고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전시된 김창열의 ‘현상’(1971·왼쪽)과 ‘제전’(1970). 윤승민 기자

 

김창열이 1969년 파리로 이주하며 그림도 변화를 맞는다. 틈새로 끈적한 액체가 흘러나오는 듯한 ‘현상’ 연작이 이때 그려진다. 미국에서 그렸던 여러 도형들이 액체처럼 흘러내리는 형태로 바뀐 것이다. 여러 시행착오와 실험 끝에 1970년대 물방울 작업이 시작됐다. 1973년 고가구를 취급하던 파리 놀 인터내셔널 갤러리에서의 개인전에 등장한 물방울 그림은 살바도르 달리를 비롯한 당대 유명인들에게 호평을 받으며 김창열의 명성도 높아진다. 이후 김창열의 그림은 마(麻)로 된 캔버스 위에 천자문과 물방울을 함께 그린 3m 높이의 대형 작품 ‘회귀 SNM93001’(1991)부터 프랑스 ‘르 피가로’ 신문 한 면에 물방울을 여럿 그린 ‘르 피가로’(1975)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전시된 김창열의 ‘회귀 SNM93001’(1991·오른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김창열에게 물방울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생전 질문을 받을 때마다 여러 답변을 내놨으나, 작고 전 ‘못 그린 물방울이 많다’는 말을 가족들에게 남겼다고 한다. 그의 삶과 작품까지 미뤄보면 물방울은 ‘죽음과 상처에 대한 애도’로도 읽힌다. 전시에는 그가 1967년에 그린 ‘제사’의 앞면과 캔버스 뒷면이 함께 공개돼 있는데, 뒷면에는 그의 영문 이름과 ‘FLESH AND SPIRIT’(살과 정신)이라는 문구가 함께 쓰였다. 전시를 기획한 설원지 학예연구사는 “김창열이 남긴 기록을 보면, 그가 인간의 폭력성과 신체성에 대한 사유를 많이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 “물방울 그림을 보면서도 관람객들이 그가 추구했던 바를 발견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말했다.

김창열의 ‘제사’(1967) 뒷면에 쓰인 글씨. 영문명과 ‘FLESH AND SPIRIT’이 쓰여 있다. 윤승민 기자

 

최초의 물방울 회화로 알려진 ‘밤에 일어난 일’(1972)보다 1년 앞서 그려진 물방울 회화 2점, 기록에만 남아있었을 뿐 실체가 공개되지 않았던 1955년 작 ‘해바라기’, 김창열이 고통스러운 시기를 보냈기에 공개하기 꺼렸던 뉴욕에서 그린 그림 8점 등은 이번 전시에 최초 공개된다. 유리로 물방울을 표현한 1993년 작 설치작품 ‘Ceremony’는 재제작돼 그의 1950~1960년대 작품들과 함께 전시된다. 유리로 된 물방울에 그가 상처를 거칠게 그렸던 초기 그림들이 비치게끔 구성돼 있다. 전시는 오는 12월21일까지. 관람료는 2000원.

김창열이 처음 그린 물방울 그림으로 알려진 1971년 ‘물방울’ 2점(왼쪽)과 ‘밤에 일어난 일’(1972).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Posted by 윤승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