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앞에 신사임당이 그린 것으로 알려진 ‘초충도’ 병풍을 두면, 오른쪽에는 국가지정문화유산 보물인 조선 궁중 화원 이징의 화첩 <산수화조도첩> 속 화조화 8폭이, 왼쪽에는 겸재 정선의 <화훼영모화첩> 화조화 8폭이 자리한다. 각각 16세기와 17세기, 18세기에 그려진 꽃과 동물들은 각기 다르면서도 비슷한 모습으로 보는 이의 눈을 사로잡는다.
대구 수성구 대구간송미술관에서 지난 4월30일부터 열리고 있는 전시 ‘화조미감’에서 벌어지는 광경이다. 지난해 문을 연 대구간송미술관의 첫번째 기획전인 이 전시는 16~19세기 조선시대 여러 거장이 그린 화조화 37건 77점을 집중 조명하고 있다.
초충도 병풍과 <산수화조도첩>, <화훼영모화첩>의 만남은 훼손됐던 <화훼영모화첩>이 완전히 복원돼 대중에 처음 공개되면서 가능했다. <화훼영모화첩>은 진경산수화로 유명한 정선(1676~1759)이 만년기인 18세기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소유했고, 미국 뱅크오브아메리카의 ‘예술 작품 보존 프로젝트’에 2019년 국내 최초로 선정돼 2년간의 복원을 거쳤다. 벌레 먹은 부분을 메우고, 색이 바래고 오염된 표면 등을 유사한 색의 안료나 비단으로 대신하면서 화첩의 순서도 정리됐다. 장닭과 암탉, 들쥐와 고양이, 두꺼비와 참개구리, 나비와 매미가 대칭을 이룬다. 뒤에는 여러 꽃이 피고 과일과 채소가 자란다. 빨강, 초록, 분홍에 금색까지 천연색을 입은 동·식물이 전면에 배치된 그림은 산의 웅장함과 강의 고고함을 그렸던 정선의 산수화와는 다른 멋을 자아낸다.

그보다 약 한 세기 전인 1642년에 이징이 그린 <산수화조도첩>은 동물보다는 새를 그렸다는 것도 특징이지만, 단색의 수묵화와 가깝다는 점도 두드러진다. 당대 화가가 아닌 문인들이 사군자와 같은 이상향을 묵빛 붓선으로 그려낸 문인화와 닮았다. 왕실의 종친이었지만 서자였다는 이유로 화원이 될 수밖에 없었지만, 그 와중에 사대부들과 교류했던 이징의 배경도 그림에 반영됐다. <산수화조도첩>은 화조화 8폭과 산수화 10폭으로 구성돼 있는데, 화조화 8폭 전체가 한 번에 공개되는 것은 처음이다.
시기상으로는 <산수화조도첩>과 더 가까운데도, 정선의 <화훼영모화첩>은 두 세기 전 ‘초충도’ 병풍과 더 닮았다. 신사임당이 그린 것으로 알려진 초충도는 많으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대여해 전시된 10폭의 초충도 병풍은 신사임당이 그린 진품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선은 이 초충도 병풍을 참고해 <화훼영모화첩>을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정선이 사임당의 아들 율곡 이이를 따르는 율곡학파의 일원이라는 점도 무관치 않다.

18세기의 김홍도, 19세기의 장승업 등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화조화도 함께 전시 중이다. 김홍도는 보물로 지정된 <병진년화첩>이나 화조 병풍의 유행을 알린 ‘화조도8폭병’에서 색의 농도를 달리해 산을 그려 원근감을 나타냈다. 동시에 동물은 과감하면서도 주변과 조화로운 구도로 배치했다. 노란 고양이를 그린 ‘황묘농접’이나 어미개와 강아지 두 마리를 그린 ‘모구양자’ 등에서는 세밀하게 표현된 동물들의 모습이 돋보인다.

장승업의 화조화는 현실의 부귀와 행복을 기원하는 길상화(吉祥畵)에 가깝다. 당대 간신을 상징했던 토끼와 그를 잡는 매를 아래위로 배치한 ‘기응치토’나 과거급제를 기원하는 잉어와 게를 한 화면에 담은 ‘어해유행’ 등이 대표적이다. 함께 있기에 어색한 사물을 그렸고 그만큼 구도도 어색하지만 그림체만은 정교하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런 영향은 20세기 근대 화가인 안중식, 조석진 등이 그린 화조화에도 나타난다.

큰 봉오리의 연꽃들도 눈에 띈다. 이인상이 그린 ‘서지백련’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칠 정도로 흰색으로 꽃봉오리를, 옅은 녹색으로 연잎을 그려 신비감을 자아낸다. 당대의 강세황이 그린 ‘향원익청’이 하늘을 향해 뻗은 연잎과 하얗지만 붉게 끝맺음한 꽃잎으로 그린 것과 대조적인데, 전시장에 나란히 놓여 흥미를 자극한다.

미술관의 보이는 수리복원실에서는 <화훼영모화첩> 복원 과정에서 밝혀진, 작품에 사용된 안료와 그 원재료도 확인할 수 있다. 수리·복원 과정을 담은 영상도 전시실 내 QR코드로 볼 수 있다. 전시는 오는 8월3일까지. 관람료는 성인 1만1000원.
- 대구 | 윤승민 기자 me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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