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쿠라이 노부히데(櫻井信榮·43) 계명대 교수(외국어문학부 일본어문학전공)는 생각보다 수줍음이 많았다. 모국어가 아닌, 유창하지만은 않은 한국어로 더듬더듬 질문에 답했기 때문인 걸까. 그에게 “생각보다 조용하신 거 같다”고 운을 띄우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맞습니다. 하지만 시위 현장에서 구호를 외치는 저를 보고 무섭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쿠라이 교수는 2013~2014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반(反)재특회(在特會·재일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 시위를 매주 토요일마다 벌여 이목을 끌었다. 사쿠라이 교수만의 1인 시위에서 10명 남짓한 지지자들이 함께하는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아무래도 일본인이 일본 단체에 벌이는 시위를, 그것도 한국에서 한다는 점이 주목을 끌었다.
한편 사쿠라이 교수는 2015년과 지난해에는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반대하는 집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일본과 한국의 소수자에 대한 혐오세력를 비판하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셈이다. 그는 “소수자의 차별을 논할 때는 한국과 일본을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며 “다수자들이 소수자를 친구·가족이라고 여긴다면, 친구와 가족을 공격하는 혐오 표현에 자연스레 반대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쿠라이 교수는 충남 천안시 남서울대 조교수로 일하다가 올해 봄학기부터 대구 계명대로 직장을 옮겨 일본어를 강의하고 있다. 대구가 ‘한국에서 대표적으로 더운 곳’이라는 이야기도 듣지 못했을 정도로 적응에 한창인 사쿠라이 교수를 지난달 27일 그의 교내 연구실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인터뷰는 한국어로 진행됐다.
■ 한국인 친구들과 놀던 신오쿠보에서 재특회 활동 보고 반 재특회 시위 참여
-재일교포 소설가인 김학영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데, 원래 한국 문학이 전공인가.
“전공은 한국 문학이 아니라 일본 문학이다. 학부 때부터 일본 문학을 전공했다. 어느날 수업 때 교수님께서 김학영의 소설을 주신 적이 있다. 그 책을 보면서 김학영과 내가 생각과 느낌, 하고픈 말이 같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때 재일한국인과 한·일 관계, 역사 등에 대해 처음 알게 됐다.”
-그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재일 한국인 연구를 한 것인가.
“아니다. 석사까지 마치고 1999년 국립박물관인 쇼와관(昭和館)에 취업했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 한국의 드라마와 영화가 한류(韓流)를 타고 인기를 끌었다. 자연스레 한국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2004년부터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 문화를 알아갔다. 한국인이 많이 모이는 도쿄(東京) 신오쿠보(新大久保)에 가서 같이 밥먹고 술먹고 한국인 친구들을 사귀었다. 그러다 2005년 12월 한국 유학을 결심하고 사직했다. 박물관 일이 재미없기도 했고…(웃음)”
이후 사쿠라이 교수는 성균관대에서 한국어 어학연수를 마친 뒤 2009년부터 한양대 일반대학원 일본언어·문화전공 박사과정에 입학해 한국생활을 시작했다. 또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본어 강사 생활을 했다. 일자리를 찾아 여러 학교를 다니면서 2012년에는 처음으로 ‘초빙교수’ 직함도 얻었다.
박사학위를 취득하기 전까지 평범한 ‘일본어 원어민 교수’로 그의 생활이 굳어지는 듯 했다. 그러다가 2013년 상황이 조금 바뀌었다. 재일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반감이 ‘재특회’와 그들의 집회로, 세상에 그 모습을 갖추어 드러나면서다. 그들이 활개친 곳은 다름아닌 신오쿠보. 사쿠라이 교수가 한국을 배우고 한국 친구와 사귀었던 곳이었다.
-‘재특회’가 사회문제로 대두되기 전부터 반 혐오표현 반대 활동을 해왔나.
“(고개를 저으며)아니다. 2010~2011년쯤 재특회의 존재를 인터넷을 통해 알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다 2013년 재특회가 신오쿠보서 집회를 열어 ‘한국인을 죽여라’는 둥 소리를 질렀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아팠다. 그 때 일본을 찾아가 직접 재특회 반대 시위에 참여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일본의 혐오세력 “재특회는 겁쟁이”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시위를 한 이유는.
“처음엔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일본에서 시위에 참여했다. 그 해 일본에 10번도 넘게 갔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강의와 연구 등) 그 중간중간에 할 일들이 있었다. 부득이하게 한국에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뭔가 할 수 있는게 없을까’ 고민하다 광화문에 나오게 됐다.”
-광화문에서 한 반재특회 시위의 반응은 어땠나.
“정말 반응이 좋았다. 한국 시민들이 악수도 해 주시고, ‘과자라도 먹으라’며 주시며 격려했다. 시민들이 ‘윗 사람들이 하는 일들이 문제다. 시민들끼리는 친하게 지내자’고도 했다. 재특회의 활동에 반대하던 일본 친구들과 다수의 일본 시민들도 인터넷을 통해 고맙다고 연락해줬다. 하지만 일본에서 나를 조롱하는 반응도 인터넷을 통해 봤다. ‘왜 외국까지 가서 그런 걸(시위) 하느냐. 한국에 왜 빠져 있느냐’며…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지 말라’는 논리를 펴는 이들도 있었다.”
-신체적 위협은 없었나.
“없었다. 그리고 무섭지 않았다. 재특회는 겁쟁이다. 그들은 집회에서 경찰이 (적법하게 신고한 ‘합법 집회’라며) 보호하기 때문에 과격하게 행동할뿐이다. 경찰의 보호가 없으면 재특회는 별로 힘이 없다. 이제 재특회의 집회에는 아무리 많아봤자 50명 정도밖엔 나오지 않는다.”
‘반재특회’ ‘반혐오표현’ 시위·활동들이 성행하며 2013년쯤 절정에 달하던 재특회의 혐오 표현들은 최근 들어서는 누그러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사쿠라이 교수가 발을 딛고 사는 한국 사회에는 오히려 혐오 표현과 그로 인한 갈등이 더 도드라지고 있다.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로 대표되는 젊은 극우세력들이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로 거리에 나와 세월호 유가족 앞에서 ‘치킨 폭식’을 하는 등 일본의 재특회와 비교됐다. 남성·여성에 대한 혐오를 뜻하는 ‘남혐’ ‘여혐’이라는 단어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일상어의 반열에 올랐다. 한국에 사는 일본인이 최근 한국사회와 혐오 표현들을 어떻게 봤을지 궁금했다.
■한국의 혐오세력 ‘성소수자 혐오’ 반대 시위에도 동참.
-지난 겨울 서울 광화문광장 촛불집회를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다.
“두번인가 세번 간 것 같다. 촛불집회가 진정한 민주주의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많은 시민들이 거리에서 질서있게, 매주 모이는 것은 일본에서는 어려울 것 같다. 아이러니한 것은 바로 옆에 태극기 집회가 벌어졌다는 점이다. 그들은 대개 기독교 보수이며, 성소수자의 인권을 공격하는 세력이기도 했다. 아시아의 진정한 민주주의 현장 옆에 그것을 부정하는 듯한 혐오세력이 있다는 게 아쉬웠다.”
-일본과 비교해 드러나는 한국의 혐오세력 특징은 무엇인가.
“혐오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2015년과 지난해 서울에서 퀴어 페스티벌이 열렸을 때 참석한 적이 있다. 성소수자들의 축제 개최에 항의하는 사람들을 보니 기독교 보수 세력·새누리당 지지자였다. 그런데 같은 세력들이 세월호 가족들의 요구에 반대하는 시위를 했다. 일본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도 성소수자에 대한 반감은 있지만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동성애자들이 모이는 동네와 가게도 있고 (한국보다) 개방적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성소수자에 대한 반감이 노골적이다. 혐오를 이용하고 이를 이용해 조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런 현상이 일본인과 다른 한국인의 기질에서 비롯됐다고 보는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인의 기질을 예로 들면 또 하나의 차별이 아닌가. 사회적인 다수자의 소수자 차별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한국·일본이라는 나라의 이름은 빼고 생각하는 편이 좋다고 본다. 어느 나라나 사회적 약자를 공격하면서 마음의 해방감을 느끼고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피해의식이 있다. 재일한국인 때문에, 세월호 사건과 피해 가족들 때문에, 진보세력들 때문에 피해를 받고있다는 의식… 이런 피해의식을 한국이나 일본이나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인터넷과 온라인 영향력이 혐오를 키운 것은 아닌가. 재특회나 일베를 보면서 온라인 세상의 영향력 때문에 혐오 표현이 심해진게 아닌지 우려된다.
“혐오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잘 쓰고 있다. 온라인 영향력이 강화돼 좋은 점도 나쁜 점도 있는 것 같다. 다만 일베나 다른 온라인 커뮤니티상에서 벌어지는 혐오표현을 그대로 방치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는 실제로 2015년과 지난해 서울에서 열린 퀴어 페스티벌에서 성소수자 혐오자들을 관찰했을 뿐 아니라 그들에 반대하는 집회를 벌였다. 또 부산에서 위안부 소녀상이 세워졌을 때도 현장에 참석했다고 했다. 그의 연구실 책상 위에는 무지개색 깃발과 ’위안부 합의는 무효다‘라는 글귀가 쓰인 손바닥 크기의 유인물이 놓여 있었다.
-국내 관련 집회 등에 연대한 경험이 있나.
“서울에서 (일본대사관 앞) 수요집회도 많이 다녔고, 부산에서 소녀상 설치할 때도 가봤다. 서울서 열린 퀴어 페스티벌에서도 성소수자들을 응원했다. 2013년 신오쿠보에서 반재특회 시위할 때 성소수자 친구들이 많았던게 계기가 됐다. 그 때 동성애자를 처음 봤다. 후에 보니 일본에서 재일 한국인들과 성소수자들, 오키나와인들이 함께 연대하고 있더라.”
-성소수자들을 어떻게 응원했나.
“2015년과 2016년 퀴어 문화축제에서 성소수자 반대 시위를 하길래, ‘성소수자 혐오 반대’ 시위를 했다. ‘동성애에 반대한다’ ‘성소수자는 잘못하고 있다’ ‘동성애는 치료의 대상’이라는 식으로 항의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치료라니… 그들의 발언에 반대한다고 맞섰다. 그러면서 한국에서도 성소수자 친구들이 생겼다. 지난달 26일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선후보 유세 현장에 뛰어들었다 경찰에 연행됐던 성소수자 활동가들 중에서도 친구들이 있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는 우익세력들의 의견을 방조했고 한국 정부도 급히 합의를 하려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위안부 문제는 정치 문제가 아니라 인권 문제다. 한국 정부는 2015년 연말부터 합의를 했다고 하는데, 피해자들을 무시하는 합의는 다시 검토해야 한다고 본다. 일본 사회가 우경화된데는 아베 신조(安倍晉三) 정권의 책임이 너무나 크다. 재특회도 독도 문제도 위안부도 정부와 일본 언론이 내셔널리즘을 선동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해외에서 이를 보는 입장에서 걱정되는게 많다.”
■“혐오표현을 방치하지 않고 잘못됐다고 지적하자”
다시 혐오 표현 이야기로 돌아갔다. 사쿠라이 교수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싸웠던 ‘혐오 표현’을 뿌리뽑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 그는 ‘다수자가, 소수자의 일을 남의 일로 여기지 않고 연대하는 것’ ‘혐오표현을 방치하지 않고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것’을 방법으로 제시했다.
-혐오표현에 맞서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성소수자 친구들이 나를 일컬어 다수자라고 하더라. 나는 이성애자, 일본인, 남성, 신체·정신적 장애가 없는, 그들의 말로는 ‘다수자’다. 다수자에게는 소수자들을 위해 나서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수자들이 우리의 친구라고 생각하다보면 자연스레 이들을 지켜야 한다고 느끼게 된다. 내가 신오쿠보에서 한국인 친구들을 지키기 위해 행동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혐오표현에 대해 ‘잘못된 것’이라고 분명하게 비판해야 한다. 방치하거나 무시해서는 안된다.”
-방치나 무시가 답이 아니라고 보는 이유는.
“일본이 방치하다 재특회의 등장을 초래했다. 재특회가 처음 생겼을 때, 그냥 두면 언젠가 사라질 거라고들 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또 혐오표현을 하던 사람들의 생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일본에서 혐오표현 때문에 징역형을 살던 사람이 교도소 밖을 나와서도 이전과 똑같이 행동하는 것들을 봤다. ‘이런 발언은 하면 안된다’는데 사회적으로 합의하고, 이를 어기는 사람에게 모두가 나서 항의하는 모습이 필요하다.”
-한국의 혐오 표현에도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대처해야 하나.
“그렇다. 일베 회원들이 광화문에서 세월호 유가족 앞에서 치킨 등을 폭식하는 것을 봤다. 일본의 재특회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공식적으로 활동했지만 일베는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었다. 익명성에 기대고 현장에서 자신의 얼굴이 찍히길 원치않는 걸로 봐선 아직 자신의 행동이 수치스럽다는 것은 안다는 거다. 그들도 그러나 일베를 비롯한 혐오표현이 공식적인 활동으로 전환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한국도 혐오표현을 방치하다 재특회 같은 이들이 나타날 수 있다. 또 정치인들이 나서서 이런 혐오표현에 적극 반대해야 한다.”
■“사드반대, 대구퀴어 축제 연대할 것”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논문’ 때문에 준 활동가로의 생활이 멈춘만큼 올해 안에 논문을 완성하고 내년에 박사 학위를 따고 싶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대구 생활에 어느정도 적응한만큼 지역 현안인 성주 고고도미사일체계(THAAD·사드) 배치 반대 활동에 뛰어들고 싶다고 했다. 또 여전히 성소수자들을 응원하고 그들에 대한 혐오표현을 막는 활동들을 하고 싶다고 했다. 대구에서도 다음달 24일 퀴어 문화축제가 예정돼 있다.
-지난해부터는 광화문 광장에서 시위를 잘 하지 못했다고 들었다. 박사 논문을 준비 중이라고 하던데.
“이번 학기에 논문을 일단 완성할 계획이다. 그리고 올해 가을학기에 논문을 제출해서 한 차례 심사를 받고, 내년 여름에 학위를 받으려고 한다. 일단 계획이 그렇다는 거다. (웃음)”
-그렇다면 논문 작성을 일단 마치는 하반기부터 더 활발한 활동을 기대해봐도 되나
“일단 성주 사드 미사일 설치 반대를 도와주고 싶다. 또 대구에 퀴어 축제가 열리도록 도와주고 싶다. 대구에서도 혐오표현 반대 운동을 지속하고 싶지만 우선 논문작성과 현안에 연대하는 게 먼저일 것 같다.
-한·일 양국에 적(跡)을 두고 있는 입장에서, ‘경계인’으로 느끼는 점이 있다면
“학교에서 젊은 학생들을 만나고, 또 한·일 학생들이 직간접적으로 교류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미래의 젊은 세대들은 지금보다 더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하게 된다. 젊은이들이 더 자유롭게 만나고 이야기하며 관계 맺는 모습들을 봤다. 미래는 한·일 관계를 비롯해 모든 사람들의 관계가 더 유연해지고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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