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남을 위해 추천사나 서문을 쓴 적이 없다.” <토지>의 박경리가 “참된 예술가에 대한 존경”이라며 어떤 책에 쓴 추천사의 일부다. “연두색과 연갈색이 주조인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수직(手織·손으로 직물을 짜는 것)의 무명 같은 것, 그런 해뜨기 전의 아침을 느낀다.”
너비 3m인 타원형 부직포 한가운데에 붉은 기운이 감돈다. 그 위로는 어두운 파란색이, 아래로는 연두색과 갈색이 서서히 나타난다. 이 그림의 이름은 ‘하늘의 토지’. 박경리가 타계한 2008년에 이를 그린 작가는, 박경리가 ‘참된 예술가’라 칭했던 방혜자(1937~2022)다.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방혜자-천지에 마음의 빛 뿌리며 간다’는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활동해 온 ‘빛의 작가’ 방혜자의 회화, 조각 등 67점을 공개하는 회고전이다. 국내 국공립 미술관에서 열리는 방혜자 첫 개인전으로, 한불 수교 140년을 맞아 프랑스 파리의 퐁피두센터, 세르누치박물관 등에서 소장하던 방혜자의 작품 40여점을 대여했다.
방혜자는 우주와 빛을 화폭에 그리고, 글로도 써온 작가다. 전시 제목은 방혜자의 시 ‘빛을 찾아서’의 마지막 두 행이다. 그는 여러 수필집도 남겼는데, 박경리가 남을 위해 처음 썼다는 추천사는 2001년 방혜자가 쓴 <마음의 침묵>을 위한 것이다. 박경리는 방혜자가 작품에서 자주 쓰는 ‘연두색과 연갈색’을 짚고, “우주적이고 유현(幽玄·깊고 그윽)하다…크고 깊은 그의 그림세계가 신기하기만 했다”고도 했다.

전시는 박경리의 말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어두운 배경 한가운데, 혹은 곳곳에 보이는 밝은 빛의 그림은 절로 우주를 떠올리게 한다. 거친 질감의 한지를 구겨 표면에 굴곡을 만든 뒤 천연 안료를 칠하면 독특한 무늬가 드러나는데, 이것 또한 천체의 표면을 생각하게 한다. 1997년부터는 부직포에도 그림을 그리면서 질감을 더욱 독특하게 표현했다. 너비 2m가 넘는 둥근 부직포에 푸른 배경과 노란 점을 찍은 ‘우주의 빛’(2002)에서 그 특징이 잘 드러난다. 지름 1.79m인 원 가운데부터 밖으로 다른 색의 동심원을 그린 ‘하늘의 땅’(2011)은 전시의 대표작이자 방혜자가 즐겨 사용한 표현의 방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방혜자는 1996년부터 프랑스 남부 루시용에서 나는 붉은 흙을 작품의 재료로 삼기 시작했다. 이 전에도 작품에서 연갈색을 즐겨 사용했던 방혜자가 ‘우주의 빛’(1997)에서 보듯 땅의 색을 더욱더 또렷하게 표현한 것은 그때부터다. 닥종이에 아크릴 물감과 천연 안료로 그린 ‘제목 없음’(1992년)에서는 검은색과 연녹색이 돋보이는데, 개울가에서 조약돌과 수초를 바라보며 ‘빛을 어떻게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던 어린 방혜자의 경험이 묻어나는 듯한 그림이다.

전시에 소개된 최근작의 제목 ‘빛의 숨결’(2021)인 것에서 보듯, 방혜자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빛을 좇았다. 빛이 통해야 비로소 완성되는 스테인드글라스도 제작했다. 프랑스의 세계유산 샤르트르 대성당에는 방혜자가 만든 스테인드글라스 4점이 2022년부터 설치됐다. 전시에는 그중 한 점인 ‘빛의 탄생’의 재현품이 전시돼 있다. 중앙부의 둥근 원과, 거기서부터 뻗어 나오는 선이 짝을 이뤄 태양처럼 보이는데, 한지의 한 부분을 움켜 들어 올리고 그 주위를 구기는 방혜자 특유의 표현 양식과 닮았다. 방혜자가 평생 그려온 우주에 진짜 빛이 맞닿아 하나가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전시는 한국전쟁 직후 앵포르멜(비정형 미술)의 영향을 받아 어둡게 그린 추상화부터, 박경리의 추천사 원고, 이응노가 쓴 편지 등 방혜자가 당대 예술가들과 교류한 흔적들도 함께 공개한다.
전시는 9월27일까지. 관람료 2000원.
청주 | 윤승민 기자 me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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