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근·현대미술 변천사를 볼 수 있는 전시가 국립현대미술관의 여러 공간에서 동시에 열리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1969년 개관한 이래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유족이 기증한 이건희컬렉션을 포함한 작품 1만1800여점을 소장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품을 바탕으로 지난달부터 차례로 문을 연 상설전과 기획전은 한국 근·현대미술의 흐름을 동시에 살필 좋은 기회다.

대한제국부터 한국전쟁까지

채용신의 1924~1925년 작 ‘허유, 유인명 초상’.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는 상설전 ‘한국근현대미술 Ⅰ’은 개화기에서 한국전쟁 직후까지의 한국 근·현대미술을 조명하는 전시다. 조선 후기 청나라에 다녀온 영선사는 현미경, 망원경, 카메라 등 신문물을 한반도에 들여왔고, 그 영향으로 전통 ‘서화’에서의 묘사는 보다 세밀하고 사실적으로 바뀐다. 김규진의 ‘해금강총석’(1920)과 채용신의 ‘허유, 유인명 초상’(1924~1925) 등에서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20세기에 들어서면 서화를 대신할 말로 ‘미술’이 등장한다. 나혜석 등이 일본에서 서양 미술사조를 들여왔고, 해부학에 기초한 누드화도 나타난다.

권진규의 1960년대 작 조각 ‘모자상’.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1930~1940년대에는 신여성과 여가 등 근대적 개념이 그림의 소재로 등장한다. 동시에 초가집과 장독대, 농악대와 무녀 등 전통풍습도 조선미술전람회 등에서 자주 다뤄진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는 전쟁의 참상과 허무함을 그린 추상·조형실험이 시작된다. 권진규의 1960년대 작 조각 ‘모자상’처럼 가족의 소중함을 다룬 작품도 전후에 등장한다.

이중섭의 1950년대 작 ‘황소’.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이번 전시의 작가 70명의 작품 145점을 보면 이런 한국 근·현대미술의 흐름을 알 수 있게끔 구성돼 있다. 작품 중 42점은 이건희컬렉션이다. ‘작가의 방’도 세 곳 별도로 마련됐다. 한국 인상주의의 선구자 오지호, 운보 김기창과 우향 박래현 부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이중섭의 작품을 집중 조명한다. 관람료는 3000원. 과천관은 다음달 26일부터는 주로 1950년대 이후의 작품을 주제로 한 상설전 ‘한국근현대미술 Ⅱ’도 함께 개최한다.

1960년대부터 최신 영상까지

김환기의 1973년 작 ‘산울림 19-Ⅱ-73#307’.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해방 후 한국 현대미술을 보려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상설전 ‘한국현대미술 하이라이트’를 보면 된다. 서울관 개관 후 첫 상설전으로, 1960~2010년대의 작품을 시대별, 주제별로 다룬다. 김환기의 ‘산울림 19-Ⅱ-73#307’(1973), 이우환의 ‘선으로부터’(1974), 이응노의 ‘군상’(1986) 등 1960~1980년대의 추상·실험미술, 신학철의 ‘한국근대사-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1989) 등 민주화 열망이 거셌던 1980년대의 민중미술을 볼 수 있다.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전시된 강익중의 ‘삼라만상’(1984~2014). 윤승민 기자

 

백남준의 ‘잡동사니 벽’(1995)을 비롯한 1990년대의 작품들에 이르면 평면을 벗어난 다양한 작품들이 기다린다. 가로·세로 각 3인치의 회화 약 8500조각과 그 앞 반가사유상으로 구성된 강익중의 ‘삼라만상’(은 이번 전시에서는 13m 높이의 벽에 조각을 줄줄이 부착한 형태로 전시된다.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전시된 양혜규의 2010년 작 ‘여성형 원주민’. 윤승민 기자

 

세계적인 설치미술가 양혜규의 2010년 작 ‘여성형 원주민’, 문으로만 사면을 둘러 정작 출입할 수 없는 문을 만든 안규철의 2004년 작 ‘자폐적인 문’(2009년 재제작) 등 조형물들을 거치면 다큐멘터리 등 영상 작품을 만난다.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작품으로 한국 최초 LG 구겐하임 어워드를 수상한 김아영의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2019), 영화감독 박찬욱의 동생으로도 알려진 박찬경의 ‘늦게 온 보살’(2019) 등이 있다. 전시 작품 수는 이건희컬렉션 9점 포함 총 86점이다. 관람료는 2000원.

한반도에도 초현실주의가?

덕수궁 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은 과천관과 서울관 상설전의 빈틈을 메우는 듯한 기획전 ‘초현실주의와 한국근대미술’을 지난달 17일부터 열고 있다. 초현실주의는 1920년대 프랑스에서 문학을 중심으로 시작된 예술사조였는데, 일제강점기에 김환기, 이중섭, 유영국 등 일본 유학생들이 시도했으나 적극적으로 전개되지는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90년대만 해도 한국에 초현실주의 미술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평가도 있었다.

김종남의 1941년 작 ‘수변’.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국내에서는 비주류였던 초현실주의적 세계를 탐구한 작가 6명을 재조명됐다. 일본으로 귀화해 마나베 히데오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으나 재일조선인 정체성 갈등을 작품에 담은 김종남, 생전 개인전을 한 번도 열지 않으며 제목도, 창작 연대도 알 수 없는 그림을 남겼으나 사후 유족을 통해 작품이 발굴된 김욱규, 1956년 현대미술가협회 창립에 기여했으나 주류가 아닌 초현실주의에 몰두하며 한국전쟁 후 비극적 현실을 극복하려 한 김영환 등이 있다. 김종남의 ‘수변’(1941)은 물가와 나무, 그 안의 동물들을 사실적이고 빽빽하게 묘사하면서 낯선 자연을 마주할 때 느끼는 기괴함을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영환의 1962년 작 ‘자화상 풍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다른 작가들의 작품 중 의도치 않게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까지 총 300여점이 전시돼 있다. 전시는 오는 7월6일까지. 관람료는 2000원. (덕수궁 입장료 별도)

Posted by 윤승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