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학고재에서 열리고 있는 엄정순 개인전 ‘보푸라기-촉각적 시선’ 전경. 학고재 제공

 

2023년 광주비엔날레에서 엄정순(65)은 ‘코 없는 코끼리’를 선보였다. 전시장에 우뚝 선 높이 약 3m 대형 코끼리 조각은 보는 이가 직접 만져볼 수도 있었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표현이 떠오른다. 엄정순은 1996년부터 사단법인 ‘우리들의 눈’을 설립하고 시각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미술교육을 해 오기도 했다.

서울 종로구의 갤러리 학고재에서는 ‘코 없는 코끼리’의 뒷이야기 격인 엄정순의 개인전 ‘보푸라기-촉각적 사건’이 열리고 있다. 광주비엔날레에서 ‘코 없는 코끼리’를 만졌던 관객 약 50만명이 조각의 양모 부분을 만질 때 보푸라기가 묻어 나왔다. 엄정순은 이 보푸라기를 모아 세척한 뒤 색을 입히고 종이나 캔버스에 붙여 ‘무늬 없는 리듬’ 연작으로 만들었다.

지난달 26일 전시장에서 기자들과 만난 엄정순은 코끼리에 묻은 보푸라기를 보며 “처음엔 너무 지저분해 보여서 빨리 찾아 없애야겠다고 생각했다”며 “감정, 마찰, 온도, 하다못해 세균까지, 버려져야 할 보푸라기 안에 우리가 감각해야 할 너무나 많은 것들이 담겨있다고 관점을 바꿨”고 말했다. 그는 “시각을 바꾸니 이렇게 귀한 재료가 없다. 내가 어떻게 50만명을 만나겠나”라며 보푸라기를 모았다. 작품으로 태어난 보푸라기는 이번 전시에서 작품을 보는 이가 다시 만질 수 있다.

서울 종로구 학고재에서 열리고 있는 엄정순 개인전 ‘보푸라기-촉각적 시선’ 전경. 학고재 제공

 

코끼리의 흔적은 여러 조각·설치 작업에도 남아 있다. ‘코끼리의 어느 모서리’ 연작은 ‘코 없는 코끼리’를 해체한 조각들이다. 시각장애인이 코끼리 신체의 각 부분을 각자 만지면서 전체를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상황을 연상시키며 감각의 불완전성을 생각하게 한다. 시멘트로 만든 높이 약 1m의 ‘코 없는 코끼리 4’(2025) 등 광주에서의 대형 조각을 축소한 듯한 조각도 3점 있다. 코끼리의 정체성인 긴 코가 없는 코끼리의 모습은 여전하다. 물론 만질 수 있다.

엄정순은 “‘본다는 게 뭘까’라는 궁금중이 어렸을 때부터 있었다”며 “질문이 또 다른 질문을 물어왔다. ‘안 보이는 건 뭘까’”라고 말했다. 1996년 맹학교의 도서관에서 점자책 몇 권이 쓰러져있는 모습을 발견했고, 시각장애인과 관련된 예술 활동을 하게 됐다. 그는 “사회봉사 차원에서 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본다는 것에 관한 관심은 ‘감각’에 대한 관심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엄정순은 “많은 사람들은 오감 중에 시각에 가장 많이 의존하지만, 신체 감각 중 가장 불안정한 것이 시각이라고 한다”며 “시각장애인은 시각적 정보가 적기 때문에 조금 더 통섭하려는 노력을 한다”고 했다. 만질 수 있는 작품들로 전시를 채운 것은 보는 것 이상으로 감각을 넓혀보길 바라는 작가의 의도이기도 하다.

서울 종로구 학고재에서 열리고 있는 엄정순 개인전 ‘보푸라기-촉각적 시선’ 전경. 학고재 제공

 

전시장 한쪽엔 너비 10m가 넘는 공간 세 벽면에 점자 교과서 1000권을 걸어 완성한 설치 작품 ‘찰나 2001-1’(2026)이 있다. 알루미늄 선풍기를 여럿 틀어 점자 책이 펄럭거리고 있는데, 이는 교과서에 실리는 기존의 지식 체계에 대한 저항이자 도전이기도 하다.

공간 가운데는 점자책 ‘흑연으로 쓴 코끼리-기록되지 않은 도서관’(2026)이 놓였다. 점자 바로 아래 작가가 목탄으로 같은 내용의 글씨를 남겼다. 엄정순은 “점자를 읽기 위해 책을 만지다 보면 자연스레 목탄이 번지게 된다”며 “보푸라기가 남았듯이 책이 까맣게 번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는 오는 28일까지.

작가 엄정순. 학고재 제공

 

Posted by 윤승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