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이름 모를 누군가와 부딪히기 전까지, 칠흑 속에서 철저히 혼자일 수밖에 없었다.
지난달 25일 서울 용산구 리움미술관. 프랑스 작가 피에르 위그는 아시아 첫 개인전 ‘리미널’의 초입을 암실로 구성했다. 눈이 어둠에 적응한 뒤 마주하는 전시 작품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전시 제목과 이름이 같은 작품 ‘리미널’에서는 얼굴 없는 사람이 바닥에서 누웠다가 서서히 몸을 일으켜 선 뒤 주위를 둘러보며 움직인다. 발걸음을 옮기면 만나는 ‘휴먼 마스크’에서는 긴 머리 가발과 검은 원피스를 입고 사람 얼굴 가면을 쓴 원숭이를 화면에 담았다. 이 원숭이는 일본 후쿠시마의 한 식당에서 종업원처럼 행동하도록 훈련을 받았는데, 동일본 대지진으로 식당과 주변 지역이 폐허가 돼 사람들이 떠난 후에도 식당에 홀로 남았다. 위그는 식당을 찾아 원숭이의 행동을 영상으로 담았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가장 큰 화면에 ‘카마타’가 있다. 칠레 아타카마 사막 어딘가에 놓인 사람의 유골과 그 옆을 지키는 작은 기계의 모습이 상연된다. 카메라와 집게손 등으로 구성된 기계는 유골에 일종의 장례의식을 한다고 작가는 설명한다. 전시장에는 얼굴을 덮은 금색 마스크를 쓴 이들도 돌아다닌다. 이 작품은 ‘이디엄’으로, 마스크에서는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린다. 삼성서울병원으로부터 전달받은 암세포가 배양된 ‘암세포 배양기’는 바로 옆 작품 ‘U움벨트-안리’와 연결됐다. 암세포의 분열 양상에 따라 ‘U움벨트-안리’에는 새로운 이미지가 반영된다.

‘리미널’(liminal)은 자극을 받았을 때 반응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때를 뜻한다. 인공지능(AI)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술을 전시에 접목해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다뤄온 작가 위그는 리미널을 “생각지 못한 무언가가 출현할 수 있는 과도기적 상태”라고 설명한다. 전시 작품 12점 중에는 그 결말을 알 수 없는 것들이 꽤 있다. 리미널과 이디엄, 카마타 등은 외부 센서와 연결돼 있다. 센서가 감지하는 소리와 빛의 변화에 따라 인공지능(AI) 기술이 더해진 전시 작품의 영상·소리는 다른 결과를 낸다. 작가는 ‘무엇이든 출현할 수 있는 상태’를 조성했지만, 무엇이 출현할지는 자신도 모르도록 만들었다. 전시실을 실험실로 꾸민 셈이다.
어두웠던 전시실의 초입도 외부 요인을 최소화한 실험실을 연상케 한다. 전시 작품에 나타난 형체들은 기괴하기도 하지만, 철저히 혼자다. 보는 이는 작품 속 대상의 움직임과 변화를 뚜렷하게 마주할 수 있다. ‘리미널’과 ‘이디엄’의 얼굴 없는 사람은 이목구비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오류를 통제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가면을 쓰고 사람처럼 움직이는 ‘휴먼 마스크’의 원숭이는 인간이라는 존재, 인간이라는 가면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위그는 실험에 가까운 자신의 전시를 두고 “내 작업은 인간존재론에 대한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질문이고 그 원형에 대한 탐구”라며 “나는 전시가 이것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전시를 기획한 김성원 리움미술관 부관장은 “작가는 기존의 인간 개념이나 현실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현실, 인간 이후와 인간 밖의 세계를 탐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위그는 지난해 ‘리미널’, ‘이디엄’, ‘카마타’를 제작했는데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미술관 푼타 델라 도가나와 리움미술관이 작품 제작을 공동 지원했고, 지난해부터 두 미술관에서 차례로 전시가 열리게 됐다.
전시는 7월6일까지 열린다. 관람권은 1만6000원이지만, 지난달 27일부터 같은 미술관에서 열리는 ‘리움 현대미술 소장품전’ 과의 통합관람권은 2만원이다. 현대미술 소장품전에서는 오귀스트 로댕의 ‘칼레의 시민’이 2016년 플라토(옛 로댕갤러리) 폐관 후 처음 공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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