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랜 클리셰 중 하나. 큰 가마 앞에 땀을 뻘뻘 흘리며 도자기를 굽는 장인이 결과물을 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망치를 휘두른다. ‘쨍그랑’. 어딘가 휘어지거나, 뜻하지 않은 색을 내는 도자기는 불량품으로 취급돼 사라진다.
서울 강남구 글래드스톤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Irreverent Forms’는 형태가 일그러졌거나, 작가의 의도대로 형태가 무너져 가는 도자기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다. 전시 제목처럼, 도예 장인이 보기엔 ‘불경한 것들’ 뿐이다.
전시에 함께 참여한 도예 작가 이헌정(58)과 김주리(45), 김대운(33)은 서로 연령대가 다르지만, 도자기의 완성보다 균열에 주목하며 각자 익숙한 표현을 선보였다. 이헌정은 디자인과 설치, 영상 등 다양한 매체로 ‘여정’이라는 주제를 탐구하지만, 그에게 물레질을 통한 전통 도예는 ‘고향’과도 같다. 그는 가마에서 도자기를 구울 때의 도자기와 유약이 우연히 변화하는 모습을 작품으로 선보인다. 그가 내놓은 도자기들은 목이 휘어져 있거나 허리가 움푹 들어간 것들이다.
약 10분의 영상 작품인 ‘무제’(2023)는 가마에 들어가기 전의 도자기가 물속에 깊이 잠겨 분해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헌정은 전시가 개막한 지난달 20일 기자들과 만나 “전통에게서 오는 부담을 부숴버리자는 마음으로 항아리를 물속에 무너뜨린 것”이라며 “전통이 아름답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기존의 가치를 부정함으로써 새로운 가치가 탄생한다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김주리의 ‘휘경’ 연작이 ‘무제’를 마주 보고 있다. 붉은 벽돌로 상징되는, 서울시 내 저층 주택가에서 볼 수 있는 다세대 주택 모양을 흙으로 빚어 굳힌 뒤 바닥에 물을 깔아 무너뜨리는 게 김주리의 대표작인 ‘휘경’ 연작이다. 김주리의 집과 작업실이 있던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의 오랜 주택들이 2008년 이후 재개발로 사라지면서 연작이 시작됐다.
김주리는 전시를 위해 신작 ‘휘경;揮景-h10’(2025)을 만들고는 다시 바닥에 물을 부었다. 주택 모양의 이번 작품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리고 작가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무너지는 중이다. 벽면에는 그가 무너뜨렸던 ‘휘경’ 연작들이 회화처럼 벽에 걸렸다. 무너진 휘경 연작의 조각을 작가가 손으로 눌러 압축해 만든 ‘클레이 타블렛’ 연작이다. 현대 개발의 아픈 역사를 은유했던 작품들이 오랜 역사를 간직한 화석의 모습을 띠고 있어 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김대운은 파편을 새로운 도자기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그의 작품 ‘Persona #2’(2021)는 파편을 모아서 달항아리 형태의 조각으로 만든 것이다. 김대운은 “깨진 조각을 모아 정상성의 층위에 있는 달항아리를 만들고, 무너뜨리는 실험을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한국 전통 예술 형태인 달항아리를 정상성의 범주에 놓고, 사회적 소수자와 같은 층위에 있는 깨진 조각으로 달항아리의 형태를 만들면서 견고한 ‘정상성’에 균열을 가하고자 한 것이다.
김대운은 ‘Blue Ceramic Culture Monument and Color Coordination’(2022)은 이집트나 모로코, 중국 등 해외와 고려청자를 만들 때 쓰였던 여러 종류의 파란 유약을 써서 만든 도자 조각이다. 여러 파편이 한 데 뭉친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역시 다양한 출신의 불완전한 존재들이 서로 기대어 균형을 이루는 모습을 통해 정상성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시는 다음달 3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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