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4년. 김환기, 그리고 아돌프 고틀리브, 미국 뉴욕에서 활동하던 두 작가가 모두 세상을 떠났다. 서로 다른 곳에서 활동했던 열살 터울의 두 작가는 예술 인생의 말년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추상의 꽃을 피워냈다.
두 작가의 51주기가 되는 올해, 서울 용산구 페이스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추상의 언어, 감성의 우주’는 두 작가의 추상 작품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전시다. 아돌프&에스더 고틀리브 재단과 환기재단의 소장품을 비롯해 1960~1970년대 두 작가가 그린 회화 16점을 모았다.
김환기와 고틀리브의 인연은 1963년 상파울루 비엔날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환기는 회화 부문 명예상을, 고틀리브는 최고상을 수상한다. 김환기는 한국 작가로서 처음 국제 미술전에서 수상해 한국 미술사에 남을 만한 쾌거를 이뤘지만, 정작 그의 마음을 끈 것은 비엔날레 미국관에서 본 고틀리브의 그림이었다고 한다. 김환기는 이전에도 추상화를 그렸지만 대부분 달이나 항아리를 소재로 한 반(半)추상화에 가까웠다. 고틀리브는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와 함께 뉴욕 화파를 대표하며 미국 추상표현주의를 선도했다.

김환기는 고틀리브가 1950년대부터 선보인 ‘버스트’(Burst) 연작 등을 보고 감명을 받는다. 김환기는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이자 홍익대 교수였지만, 고틀리브의 그림을 보고 브라질에서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미국으로 향한다. 뉴욕에서 펼쳐진 김환기의 예술세계 말년은 십자 또는 사분면 구도를 바탕으로 한 추상화와 점화였다. 한국적인 추상화로 알려진 김환기는 이 시기 점·선·면에 더욱 천착했다.
전시작 중 푸른 배경에 검은 점을 여럿 찍은 ‘9-I-70 #140’(1970)은 김환기가 과거 거칠게 찍던 점을 보다 일정하고 정돈되게 표현한 결과물이다. 분홍색 배경이 돋보이는 ‘무제’(1967)를 비롯한 십자 구도의 추상 작품들은 하늘과 바다, 별자리 등 자연과 우주 그 자체를 연상케 한다.

김환기는 이런 작품을 그릴 때 고틀리브와도 교류했음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 상파울루에서 고틀리브의 작품을 보고는 ‘내 감각과 동감되는 게 있었다’고 했으며, 고틀리브와 가까웠던 로스코의 화실에 들렀던 일이나 고틀리브와 투병 중에 전화 통화를 했다는 내용도 김환기의 뉴욕 생활 중 쓴 일기에 적혔다고 한다. 김환기는 1956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3년간 작업을 한 적도 있었지만, 그때는 뉴욕에서만큼 다른 작가의 작품에 관심을 두지는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김환기는 고틀리브의 작품이 한국에서 자주 보던 작품보다 크게 그려진 것에도 주목했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가로가 90인치(228.6㎝)인 ‘Red vs Blue’(1972)나 ‘Expanding’(1962)을 보며 김환기의 감흥을 짐작해볼 수 있다. 작품을 보는 이에게 서사를 제시하기보다는 직관적인 감정을 이끌어내려 했던 고틀리브의 작품은 단순한 구조 속에 눈에 띄는 색채 대비와 거친 붓질 등 뚜렷한 특징을 보인다.

닮은 듯 다른 두 작가의 그림을 함께 보며, 다른 배경에서 활동해 온 작가들이 추상 회화라는 일종의 언어를 통해 인간 존재, 우주적 보편성 같은 주제를 놓고 교류했을 모습을 상상해 보게 된다. 전시는 내년 1월10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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