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 황….” 천자문이 초입부터 이르기를, 땅은 누렇고 하늘은 검다. 중국 고전 <주역>과 <주례>도 “(검을) 현(玄)은 하늘의 색”이라고 했다. 노자의 <도덕경>도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신비와 무한한 가능성을 ‘현지우현(玄之又玄)’이라고 했다.
어둠과 죽음 등 부정적인 이미지가 연상되는 검은색은 백의민족으로 불려온 한민족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만 같다. 하지만 조선에서도 검은색은 하늘의 색이었다. <주례>의 사상은 조선의 기반이 됐고, 이는 국가 최고의 예복을 현(玄)색으로 만드는 배경이 됐다.
서울 강남구 호림박물관 신사분관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 ‘검은빛의 서사-검은색으로 펼쳐낸 무한과 생성의 풍경’은 한민족의 문화에 자리한 검은색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자리다. 국가지정문화유산 보물 2점을 비롯한 전통 유물부터 현대미술 작품까지 함께 배치돼 미처 몰랐던 검은색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한다.
그 의미를 짐작게 하는 것이 보물인 ‘박유명 초상’(1623년경)이다. 그가 입은 검은 옷은 흑단령이 다. 인조반정에 참여한 무인 박유명(1582~1640)은 공신으로 인정받은 뒤 초상화를 남기게 된다. 바닥의 무늬, 배에 그려진 호랑이의 자태는 박유명이 입은 흑단령의 높은 지위를 가늠케 한다. 조선 초기 조정의 의식 때 입는 색상은 정해져 있지 않았으나, 1446년 <세종실록>에는 국정을 의논하는 회의에 착용할 단령의 색을 검은색으로 한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흑단령의 시작이다. 시간이 지나며 미세한 변화는 있었지만 검은 기운이 돈다는 점은 바뀌지 않았다. 지난달 27일까지 전시 후 반환됐던 보물인 ‘이하응초상 흑단령표본’(1869)에서도, 당대 실력자인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입은 흑단령이 보인다. 19세기에 쓰인 흑단령도 전시돼 있다.

절반 이상 유실된 ‘문조(익종) 어진’(1826)에도 순조의 아들이자 헌종의 아버지인 추존왕 문조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가 입은 옷은 왕실 최고의 예복으로 국왕이나 왕세자가 종묘사직에서 제사를 지낼 때 착용한 면복(冕服)이다. 여러 무늬와 문장이 섬세하게 묘사돼 있어 검은 면복의 높은 지위를 실감하게 한다. 고종의 아들 영친왕이 사용하던 규갑(왕실이 의례 때 손에 드는 옥판인 ‘규’를 보관하던 갑)에도 검은색이 칠해져 있다.
검은색은 왕실과 조정의 높으신 분들만 점유하던 것은 아니다. 문인과 사대부는 종이에 먹으로 자연을 그렸다. 검게 염색된 종이에는 금가루로 불교의 이상향이 그려지기도, 경전이 쓰이기도 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위백규(1727~1798)는 <존재집>에서 흑(黑)을 ‘새로운 순환과 생성의 출발점’이라고 재해석했다. 검은색은 흔히 소멸이나 죽음의 색으로 해석되지만, 순환과 시작, 무한의 색으로 종교적인 상징과 연관되기도 했다.

16~17세기 화가 이징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이금산수도’는 검은 종이에 이상향 금강산을 묘사한 것이다. 금가루에 아교를 섞어 종이에 그리는 그림은 종이에 먹으로 선을 긋는 것보다도 어렵지만, 이징이 뛰어난 기술로 표현해낸 금강산은 바탕의 검은색 덕에 수묵화와 다르게 확장되는 이상향을 표현해냈다. 신겸의 ‘관음보살도’(1790), 체균 외 3명이 그린 ‘아미타설법도’(1824) 등은 불상에서만 보던 금빛의 보살을 검은 화면에 그려냈다. 어두운 밤에 촛불을 켜 두면 금빛 선과 면은 더욱 빛나 그림을 보는 이가 느끼는 신성함이 배가 됐다고 한다.

전시의 중간마다 현대미술 작품이 함께 소개된다. 송수남의 ‘붓의 놀림’(1995)과 서세옥의 ‘사람’ 연작 2점(1990·1998)은 먹의 농담과 선을 현대의 추상적인 표현으로까지 확장해냈다. 이배의 ‘불로부터’ 연작 2점(2003)은 숯의 색과 질감으로 오랜 기간 이어져 왔던 검은색 표현을 확장해냈다. 전시를 위해 제작된 김호득의 대형 설치 신작 ‘흔들림, 문득 공간을 그리다’(2025)는 외부의 빛이 차단된 전시 공간 바닥에 큰 벼루를 놓아 먹물을 가두고 그 위에 대형 한지 10여 장을 매달아뒀다. 내부에서 비추는 빛 덕에 한지 뒤편에 지는 그림자는 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산수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전시는 다음달 29일까지. 관람료는 성인 1만원.

'문화는 이렇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9월29일]낙동강 마지막 주막 ‘삼강나루 주막’ 국가민속문화유산 지정 예고 (0) | 2025.09.30 |
---|---|
[9월28일]역사의 바람에도 꼿꼿하게 남은 대나무, 광복 80주년에 보다 (0) | 2025.09.30 |
[9월25일][책과 삶]멸종 예정된 존재, 인류…유일한 가능성은 ‘우주’ (0) | 2025.09.27 |
[9월25일]고종이 선교사에게 하사한 ‘나전산수무늬삼층장’ 국가민속문화유산 지정 (0) | 2025.09.27 |
[9월24일]박서보가 쓴 원고, 첫 자서전으로 전 세계 동시 출간 (0) | 2025.09.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