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15일][너머, 넘어 Beyond Olympics](6)“이젠 우생순 아닌 희생순으로…우리만의 스토리 다시 써야죠”
각본은 없다/그리고 다른 이야기들 2020. 1. 16. 23:1410회 연속 본선 여자 핸드볼
강재원 한국 여자 핸드볼 국가대표팀 감독이 지난 9일 부산 기장체육관에서 진행된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도쿄 올림픽 메달에 대한 의지를 밝히고 있다. 부산 | 윤승민 기자
런던서 ‘좌절’ 강재원 감독 “초년병처럼 어느 때보다 애절…희생 필요”
더 빨라진 유럽팀 대비, 피지컬·골키퍼 트레이너 등 파트별 전문팀 지원
대학생 선수들, 훈련에 첫 합류 예정…8년 노메달 눈물 씻고 ‘부활’ 다짐
한국 여자 핸드볼의 올림픽 출전 이력은 곧 역사다. 지난해 10월 열린 2020 도쿄 올림픽 여자 핸드볼 아시아 예선에서 올림픽 본선행 티켓을 따내면서 1984 로스앤젤레스(LA) 올림픽 이후 ‘10회 연속 올림픽 출전’의 금자탑을 쌓았다. 올림픽 핸드볼 사상 최다 연속 출전 기록으로, ‘드림팀’이라 불리는 미국 남자 농구 대표팀의 올림픽 연속 출전 기록과 같다.
대표팀을 이끄는 강재원 감독(55)의 올림픽 경험도 만만치 않다. 현역 시절 유럽에서 뛴 스타였던 강 감독은 남자 핸드볼 대표팀 선수로 세 차례 올림픽 무대에 섰고, 1988 서울 올림픽에선 은메달을 안았다. 2004년엔 방송 해설자로, 2008년엔 중국 여자 대표팀 감독으로, 2012 런던 대회 때는 한국 여자 대표팀 감독으로 올림픽을 경험했다.
올림픽 무대가 익숙할 법도 하지만, 여자 핸드볼에도, 강 감독에게도 도쿄 올림픽을 앞둔 각오는 또 새롭다. 지난 9일 부산 기장체육관에서 경향신문과 만난 강 감독은 “어느 때보다 애절한 마음으로 올림픽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 감독의 애절함은 그가 가장 최근에 치른 올림픽이었던 2012 런던 대회의 아쉬움이 너무나도 컸기에 생겨난 감정이다. 2004년과 2008년 연거푸 메달을 딴 여자 핸드볼 대표팀은 야심차게 3연속 메달 사냥에 나섰으나 대회 초반 김온아(SK슈가글라이더즈) 등 주요 선수들의 잇단 부상으로 고전했다. 악전고투 속에서도 4강까지 올랐으나, 준결승과 동메달 결정전에서 연거푸 패해 메달 기회를 놓쳤다.
여자 핸드볼은 2016 리우 대회에서 조별리그 탈락이란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래서 도쿄 올림픽을 자존심 회복의 장으로 삼으려 한다. 2017년 다시 여자 대표팀 감독직에 복귀한 강 감독에게도 8년 전의 아픔을 씻을 기회다. 그는 “이번이 한국 핸드볼에 기여하는 마지막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최선을 다해, 애절하게 대회에 임하고 싶다”고 말했다.
부담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강 감독은 “핸드볼이나 올림픽에 대한 관심이 줄었다지만, 평소 스포츠에 관심 없던 주변 사람들도 ‘이번 올림픽에서는 잘해야 하지 않느냐’고 물어온다”고 말했다. 여자 핸드볼 하면 빠지지 않는 키워드 ‘우생순’(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도 넘어야 할 과제처럼 다가올 때가 있다. 강 감독은 “영화와 올림픽에서의 선전을 통해 핸드볼이 전보다 많은 지원을 받게 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은 선수들에게 ‘우생순’이 아닌 우리만의 스토리를 다시 써야 한다고 강조하곤 한다”고 말했다.
‘우생순’의 배경이 된 2004년 대회, 영화가 상영되고 베이징 올림픽이 열렸던 2008년과는 환경이 달라졌다. 당시 한국 핸드볼은 스피드를 앞세워 유럽 강국들을 연파했지만, 이제는 유럽팀이 더 빠른 핸드볼을 한다.
강 감독은 이런 대표팀에 ‘희생’이 필요하다고 했다. 강 감독은 “선수들이 경기를 뛴 시간이 짧으면 자신이 배제됐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많이 뛰지 못한 선수는 경기를 치르고 난 뒤 표정이 밝지 않다”며 “주전급 선수들 몇몇이 60분을 뛰는 것보다, 여러 선수들이 10분·20분·30분씩 나눠 뛰면서 각자 맡은 몫을 해줘야 메달권에 가까이 갈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 남자 농구 ‘드림팀’과 타이…‘꿈의 대기록’ 달성 여자 핸드볼 대표팀 선수들이 지난해 9월29일 중국 안후이성 추저우에서 막을 내린 2020 도쿄 올림픽 여자 핸드볼 아시아예선에서 1위로 본선 티켓을 따낸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대한핸드볼협회 제공
그러면서 “이제 ‘우생순’이 아니라 ‘희생순’이면 좋겠다”고 했다.
단순히 선수들의 희생을 강요하기만 하는 건 아니다. 대표팀은 보다 체계적인 방법론을 바탕으로 올림픽을 준비하고 있다. 강 감독은 “유럽에서 온 피지컬 트레이너를 비롯해 골키퍼·필드 파트 등 분야별 전문 지도자들이 팀을 돕고 있다”며 “전보다 세세한 전력분석도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선수들이 하체를 이용한 페인팅 동작을 자주 구사해 유럽에 비해 무릎, 발목 부상이 많다는 것, 아시아 무대에서 슈팅 방어율이 50% 정도 되는 국내 골키퍼가 유럽의 빠른 슈팅을 상대하면 방어율이 10%대까지 떨어진다는 것도 세분화된 전력분석으로 파악한 것들이다.
코리안리그에 뛰지 않는 대학생 선수들 중 몇몇도 상비군 개념으로 진천선수촌에서 합숙 훈련을 할 예정이다. 이 또한 이번 올림픽을 앞두고 여자 핸드볼 대표팀에서 처음 시도하는 것이다. 강 감독은 “뽑히려는 선수들 간의 경쟁이 치열할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 12월 세계선수권 때 부상으로 불참한 선수들부터 대학생 선수들까지, 최고 실력의 선수들을 선발하기 위해 강 감독은 머리를 싸매고 있다.
강 감독은 “내가 유럽에서 선수로 뛰고 지도자로 일할 수 있던 것은 한국 핸드볼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마지막으로 희생한다는 생각으로, 처음 대표팀 감독을 맡았던 초년병의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다”는 말로 굳은 다짐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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