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곳곳에서 이렇게 큰 영향력을 끼쳤던 만델라였지만, 정작 남아공 안에는 그의 서거에도 ‘울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지난 5일 타계한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그를 추모하는 기간만 열흘이었고, 영결식을 찾은 추모객만 따져도 10만여명에 이른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등 세계 정상급 인사들 100여명도 남아공까지 날아와 추도식에 참석했다.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과 오바마 대통령이 손을 맞잡았고,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난 지미 카터,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들까지 오랜만에 대중 앞에 모습을 보였다. 만델라 추모 물결은 지역과 종교를 막론하고 전세계로 흘러, 만델라가 생전에 외친 ‘평화·화해’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북한에서도 추모 메시지를 보내게 했다.
고유문화 보존 명목으로 흑인거주 금지
전세계 곳곳에서 이렇게 큰 영향력을 끼쳤던 만델라였지만, 정작 남아공 안에는 그의 서거에도 ‘울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바로 노던케이프주 오라니아 백인 군락에 사는 ‘아프리카너’(Afrikaner·남아공에 정착한 백인)들이었다.
흑인과 백인 추모객들이 지난 9일 요하네스버그 넬슨 만델라 자택 근처에서 만델라의 삶을 기념하며 함께 어울려 춤을 추고 있다. 요하네스버그 / AP연합뉴스
만델라가 28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프레데릭 데클레르크 당시 남아공 대통령과 아파르트헤이트(남아공 인종분리 정책)를 허물기 시작했던 1990년, 이들은 ‘스스로’ 다수 흑인들과의 인종분리를 선택했다.
로이터통신은 카페에서 음료를 홀짝이던 젊은이들, ‘백인 지배의 상징’인 아프리칸스어(아프리카너의 언어)로 방영되는 TV 채널에 시선을 고정한 백인 군락 거주자들의 모습을 전했다. 길거리를 지나던 나이 지긋한 한 여성은 “만델라에 대해 잘 모른다”며 발걸음을 황급히 재촉했다. 제이컵 주마 남아공 대통령의 만델라 서거 발표 이후에도, 오라니아 거주자들 1000여명에게선 별다른 추모 움직임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라니아에 백인 전용 마을을 세운 것은 대학교수이자 아프리카너였던 카렐 W 보쇼프다. ‘아파르트헤이트의 아버지’라는 평가를 듣는 헨드릭 페트부르트 전 남아공 총리의 양아들이기도 한 보쇼프는 ‘아프리카너의 문화와 언어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20만 달러에 땅을 사들여 지금의 백인 군락을 만들었다. 이곳에는 흑인들의 거주나 생활이 금지돼 있다. 고유문화를 보존한다는 명목 아래 철옹성 같은 진입장벽을 세운 것이다. 그런데 이 군락엔 문화 보존과는 상관없이 남아공의 다수 흑인들에 대한 반감도 함께 있다. 초창기 이 지역의 경제적 기반이던 아프리카너 농부 수백명이 흑인 일꾼들에게 많이 살해당했던 탓도 있지만, 만델라 집권 후 다수 흑인들을 위해 시작된 정책에 거주자들이 ‘역차별’을 느끼면서 반감이 형성된 것이다.
생전 만델라는 흑인, 백인, 인도계 등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화해하며 조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남아공에서 보고 싶어했다. 백인과의 투쟁을 주장했던 아프리카민족회의(ANC) 동료들과 달리 만델라가 끝까지 ‘비폭력 운동’을 고집한 것은 그 때문이다. 만델라는 대통령 당선 이듬해인 1995년 8월 직접 오라니아를 찾아 설립자 보쇼프의 양어머니(페트부르트의 미망인)를 만났다.
흑인과 백인 사이의 갈등 기류를 넘으려는 만델라의 시도에 오라니아 거주자들뿐 아니라 이 장면을 지켜본 사람들은 모두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이후에도 제이컵 주마 대통령이 2010년 오라니아를 찾는 등 흑-백 갈등을 해소하려는 움직임은 20년 가까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만델라의 서거 때 오라니아에서 목격한 장면들은 인종 갈등 봉합 노력이 아직 남아공에서 꽃피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올해 ‘제 2의 오라니아’로 떠오른 하우텡주의 클라인폰테인 백인 군락은 남아공 흑-백 갈등이 더 잘 드러난 곳이다. 아프리카너 고유의 건축 양식으로 지은 집들이 줄지어 있고, 모든 간판이 아프리칸스어로 된 이 곳 역시 오라니아처럼 흑인들이 거주할 수 없는 지역이다.
지난 5월에 한 흑인 경찰관이 클라인폰테인 거주를 거부당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이 마을은 설립 20여년 만에 화제가 됐다. 클라인폰테인의 흑인 거주 반대 방침에 제1야당 민주동맹(DA)까지 시위에 나섰다. 그러자 저수지에서 펌프를 이용해 물까지 자급자족했던 거주자들은 “이미 정부에 의존하지 않고 살고 있으니 남아공 정부는 우리가 독립적으로 행동하도록 두라”고 맞받아쳤다. 그러나 인근 지역인 츠와네시 시장은 “여전히 아파르트헤이트가 최고의 시스템이었다고 생각하는, 그저 과거를 살고 있는 사람들일 뿐”이라고 백인 군락 사람들에 대해 평했다.
인종갈등 해소는 남아공의 영원한 숙제
백인 군락들이 그들의 존립 근거로 내세운 ‘문화적 순수성 보존’은 ‘타문화 포용’과 서로 충돌하곤 한다. 때문에 백인 군락에서 나타나는 인종 갈등은 아프리카너들의 의지가 불가피하게 빚어낸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문제는 아프리카너들이 문화를 보존하면서 타문화, 특히 다수 흑인들의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백인 군락에서는 아프리카너가 남아공에 다수 거주하고 있는 줄루족과의 전투에서 이긴 날은 지역 공식 기념일이지만, 만델라 타계에는 아무런 의미부여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상대 인종을 이해하지 않는데 갈등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이 모습은 백인 군락뿐 아니라 남아공 전체에서 발견할 수 있다. 수십년간의 지배-피지배 관계, 그리고 경제적 불평등으로 이미 남아공엔 상대 인종에 대한 반감이나 피해의식이 만연하다. 만델라 타계에 맞춰 남아공을 찾은 워싱턴포스트는 한 흑인 중학생에게 “이미 충분한 돈을 가진 백인들에겐 흑인보다 기회가 더 많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백인들도 흑인경제력강화(BEE) 정책 등 경제적 특권을 잃어 불만이 많다. 이권을 뺏겼다고 느끼는 백인들과 여전히 경제적 이권을 얻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흑인들. 이들의 감정은 상대 인종에 대한 반감으로 전이돼 언제든지 인종 갈등으로 비화시킬 수 있다. 그런 와중에 다른 인종, 다른 민족을 이해하려 노력하기는커녕 인종 사이의 장벽 세우기만 계속된다면, 인종 갈등은 남아공의 영원한 숙제로 남게 된다.
현재 오라니아의 회장을 맡고 있는 카렐 보쇼프(카렐 W 보쇼프의 아들)는 만델라 타계에 대한 질문에 “우리는 백인들끼리만 함께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굳이 허락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각 개인이 헌법을 지키며 잘 살아가는 것이 결국 만델라가 진정으로 원하던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그러나 모든 인종이 평화 속에 살아가는 ‘무지개 나라’를 꿈꿨던 만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동등한 기회를 부여받아 조화롭게 사는 자유민주사회의 이상을 소중히 여겨 왔습니다. 그것은 내 삶의 목적이자 이상입니다. 필요하다면 기꺼이 나의 목숨을 바칠 이상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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