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코위는 인도네시아 대선에서 31년 독재자 수하르토의 사위와 맞붙어 험난한 여정을 치렀다. 그러나 결국 대선은 조코위의 승리로 끝났고, 인도네시아는 ‘군 출신, 정치 엘리트 출신’이 아닌 첫 대통령을 맞이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을 ‘MB’로 부르듯, 인도네시아의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전 대통령도 ‘SBY’로 불렸다. 긴 이름 때문에 이름 영문 약자가 애칭처럼 굳어졌다. 10월 20일 취임한 유도요노의 후임 조코 위도도 대통령도 자신의 이름 대신 별명을 불러달라고 공식석상에서 밝혔다. 하지만 그의 별명 ‘조코위’가 입에 붙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이미 인도네시아인들, 아니 전 세계 언론에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조코위라는 말이 올 봄부터 자주 언급됐기 때문이다.

조코위는 인도네시아의 7대 대통령이 됐다. 4월 총선부터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고 이미 유력한 대선후보로 떠올랐다. 언뜻 비슷한 외모 때문에 ‘인도네시아의 오바마’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오바마와는 또 다른 매력으로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메탈 밴드 ‘메탈리카’를 좋아하는 단출한 셔츠 차림의 아저씨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수라카르타(솔로) 시장, 자카르타 주지사 시절인 9년 동안 지역 시장을 누비며 대중들의 의견을 자주 들었다.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한 무상의료, 교육비 지원 정책은 이러한 노력의 결과다. 덕분에 조코위는 지자체에서 적잖은 경력을 쌓은 친서민 행정가로 사랑받았다. 군 출신·엘리트 계층 출신으로 한정됐고, 부패와 비리로 얼룩진 기존 정치계에 ‘조코위 열풍’이 불었다.

인도네시아의 전·현직 대통령인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오른쪽)과 조코 위도도가 대통령 취임식이 열린 10월 20일 수도 자카르타 대통령궁으로 함께 들어서고 있다. 자카르타/AP연합뉴스


50만 도시 친서민 시장으로 발판 다져
총선과 대선과정은 순탄치 않았고, 상대 후보의 견제가 이어졌다. 조코위의 대권 등극이 어려울 수 있다는 관측도 나왔다. 그러나 결국 대선은 조코위의 승리로 끝났고, 인도네시아는 ‘군 출신, 정치 엘리트 출신’이 아닌 첫 대통령을 맞이했다.

조코위는 2005년 수라카르타 시장이 되기 전까지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다. 1961년 자바섬 수라카르타에서 태어난 조코위는 대학에서도 임학을 전공한 가구업자였다. 많은 정치인들이 대학생 때부터 정치활동에 뛰어들었지만, 조코위의 행보는 정치와 무관했다. 2005년 시장에 당선됐을 때도 조코위의 정치경험 부재에 적잖은 우려가 나왔다.

그러나 시장으로서 조코위는 눈에 띄는 업적들을 여럿 세웠다. 전 수라카르타 시민들에게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했다. 전통시장을 조성하면서 버려진 공원을 다시 살렸다. 도심에는 보행자 전용도로를 조성했고, 시 외곽 빈민들이 살아갈 주거지를 건설했다. 직접 도시 시장으로 나가 서민들을 만나는 행사인 ‘블루수칸’은 수라카르타 시장 때부터 시작됐다. 조코위가 재임하며 수라카르타는 ‘자바섬의 정신’이라는 표어를 내건 자바섬 전통문화 관광지로 떠올랐다.

이를 계기로 조코위는 ‘친서민 시장’이자 ‘일 잘하는 시장’으로 자리매김했다. 2008년 인도네시아 주간지 템포가 선정한 ‘2008년 인도네시아 10대 시장’에 선정됐고, 2012년에는 ‘범죄도시를 문화·관광도시로 만든 공로’를 인정받아 영국 런던의 싱크탱크 ‘시장재단’이 선정하는 ‘2012년 세계 시장상’ 3위에 올랐다.

능력을 인정받은 조코위는 인구 50만의 소도시 시장에서 2012년 10월 3000만 인구의 지역권인 자카르타 주지사가 된다. 시장 때 성공적으로 정착시켰던 무상교육, 의료비 지원을 자카르타에서도 실시했다. 시민들을 회의에 불러 정책 방향을 들었고, 시장에 찾아가는 ‘블루수칸’도 계속됐다. 이때부터 조코위는 차기 대선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정치권에 발을 담그지 않았던 조코위에게 전 대통령이자 현재 투쟁민주당(PDI-P) 대표인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가 손을 내밀었다. 투쟁민주당의 지지가 40%에도 미치지 못하자, 2014년 대선 출마설이 돌던 메가와티는 결국 전국적 인기를 끌었던 조코위를 대선후보로 지명했다. 4월까지 조코위의 지지율은 대선후보 중 가장 높았다.

총선이 끝나고 대선구도가 가려졌다. 상대 후보로는 대인도네시아운동당(그린드라당) 대표인 프라보워 수비안토가 나섰다. 프라보워는 31년 독재자 수하르토의 사위였으며, 전형적인 군 출신 정치 엘리트였다. 수하르토가 축출되던 1998년에는 학생시위를 탄압했다는 의혹 속에 요르단 망명을 떠나기도 했다. 친서민 행정가로 대중의 지지를 받은 조코위가 독재자의 하수인이던 프라보워와 맞붙은 것이다.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왼쪽)이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와 함께 10월 13일 자카르타 중부 한 시장의 의류점 앞에 함께 서 있다. 회의 참석차 인도네시아를 찾은 저커버그는 이날 조코위를 만나 조코위의 시장 방문인 ‘블루수칸’에 관심을 보였고, 두 사람은 즉흥적으로 시장 방문에 나섰다. 자카르타/AP연합뉴스


여소야대 의회와 당내기반 취약 약점
그러나 조코위의 대선 여정은 험난했다. 프라보워는 기업가인 동생의 자금지원을 받았고, 과거 정치권력의 지원도 등에 업었다. 정당 대표답게 언변도 화려했고, 정치적인 전략도 뛰어났다. 대선을 앞둔 내내 조코위는 중국계 기독교인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세계에서 이슬람 인구가 가장 많은 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 소수민족·소수종교 출신이라는 점은 지지 확보에 치명적이었다.

행정 경력은 많았지만 정치는 초보였던 조코위의 선거보좌진은 지지도가 떨어져도 손을 쓰지 못했다. 투쟁민주당 내에서도 조코위를 견제하던 기존 정치인들은 조코위 지원에 소극적이었다. 결국 조코위는 선거를 불과 이틀 앞두고 이슬람 성지인 사우디아라비아 메카를 방문했다 돌아오는 강수를 쓰기도 했다. 그리고 7월 대선, 조코위는 53%의 표를 얻어 프라보워를 제치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선 뒤 한동안 후폭풍이 불기도 했다. 프라보워가 대선 직후 결과에 불복하며 헌법재판소에 선거부정 소송을 제기했다. 프라보워의 지지자들이 선거 결과 불복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헌재에서 지난 8월 소송을 기각했고, 대선을 둘러싼 갈등은 누그러졌다.

대신 프라보워의 정치공세가 시작됐다. 지난 9월 26일 인도네시아 의회에서는 지역의회 의원을 직선 투표로 선출하는 대신 임명해 정한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프라보워를 지지하는 다수 야권의원들이 밀어붙인 결정이었다. 조코위는 “민주주의에 대한 역행”이라고 반발했다. 10월 초 새로 구성된 의회 의장단도 전부 야권 인사로 채워져, 조코위는 여소야대 의회와 함께 대통령직을 시작하게 됐다.

의회뿐 아니라 관료 등도 구정치권과 결탁돼 있어 조코위의 개혁이 난항을 겪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그가 2005~2012년 수라카르타 시장직은 잘 수행했지만, 자카르타 주지사 시절 토목·건설 등 대형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끝내지 못했다는 비판여론도 있다. 소도시보다 큰 규모의 국가를 운영할 능력이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된 것이다. 섬으로 된 인도네시아에서 생산·물류를 활성화하려면 대규모 토목공사를 통해 물류망을 구축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메가와티 외에 당내 지지층이 전무하다는 점도 조코위의 약점 중 하나다. 파벌주의에는 자유롭겠지만, 당내 버팀목도 없는 상황이다. 이 가운데 재정적자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연료보조금 축소’도 고민거리다. 조코위 정부는 당선 후 연료보조금을 축소할 뜻을 줄곧 밝혀 왔다. 그러나 보조금이 축소되면 석유·가스 가격이 올라 주민들의 반발이 불보듯 뻔한 상황이다. 조코위는 취임을 앞두고 연이어 가진 언론 인터뷰에서 “시장·주지사 때도 의회에 지지층이 없었지만 일은 잘해왔다”며 “(보조금 등에 대해) 국민들에게 왜 이 정책을 해야 하는지 정부가 설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Posted by 윤승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