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2000년대 새 교통수단
ㆍ80%가 트램 도입
ㆍ북한 평양·청진도 운행
‘무가선 저상트램’. 익숙하지는 않지만 어려운 단어도 아니다. 무가선이란 말은 가선(架線)이 필요 없다는 뜻이다. 지하철 같은 전동차처럼 전력을 공급하는 전기선이 없어도 움직일 수 있다. 저상(底床)은 요즘 늘어난 저상 버스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트램(tram)은 전차라는 뜻의 영어단어인데, 특히 도로 위를 달리는 노면전차를 뜻한다. 일제강점기 서울을 다룬 드라마나 미국 샌프란시스코, 유럽 도시들을 촬영한 영상에 등장하는 도로를 달리는 전차가 바로 트램이다. 저상트램은 바닥이 낮아 몸이 불편한 교통약자나 휠체어·유모차도 쉽게 탈 수 있는 노면전차다.소개가 길었다. 사실 무가선 저상트램은 올해 국내 여러 도시의 도로를 달릴 예정이었다. 2012년 처음 첫선을 보일 때만 해도 당시 국토해양부는 ‘2015년 말까지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올해가 다 가도록 현실화되지 않았다. 트램이 환경친화적이고 건설비·운영비가 적다는 장점에도 불구, 교통 흐름을 방해한다는 비판의 벽을 넘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겨울에도 무가선 트램은 도로가 아닌 시험 선로에서 새해를 맞이하게 됐다.
■ 친환경 최첨단 기술의 집약체
무가선 저상트램 개발은 2009년부터 시작됐다. 당시 이명박 정부의 ‘저탄소 녹색성장’ 슬로건에 맞춰 친환경 고효율 교통수단을 개발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던 때였다. 한국철도기술연구원(철기연)과 현대로템, LG화학 등은 가선을 통해 전력 공급을 받는 동시에 배터리로 저장된 전력으로도 움직일 수 있는 ‘하이브리드 트램’ 개발에 착수했다. 그리고 총 연구비 369억원을 투입했다.
무가선 트램이라지만 엄밀히 말하면 가선이 필요하다. 리튬 폴리머 배터리에 전력을 공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가선은 도심 외곽에 설치하고, 도심을 주행할 때는 배터리에 저장된 전력을 이용한다. 도심에 철탑이나 전기선을 세울 필요가 없어 도시 미관도 해치치 않는다. 트램에 탑재된 배터리는 ‘세계 최고 수준의 고용량·고효율 배터리’라고 철기연은 설명한다. 배터리의 최대 저장 용량은 162kwh로 일본의 72kwh, 프랑스의 27kwh보다 많다. 15분 동안 충전하면 25㎞를 가선 없이 달릴 수 있다. 서울 지하철 8호선 구간(약 18㎞)을 편도로 운행하고 남을 정도다. 2013년 개발된 전기열차 무선충전 기술도 트램에 적용할 수 있다. 도로에 전기선을 매설해 60㎑ 고주파 전력을 자기장으로 변환해 충전하는 방식으로, 가선 없이도 트램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도로 한가운데 궤도만 설치하면 운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별도의 선로를 건설해야 하는 경전철보다 낫다. 차량 폭도 일반 도로 폭과 크게 다르지 않아 기존 도로에 매립형 궤도를 놓기만 하면 된다. 철기연은 지름 25m인 곡선도 무리 없이 달릴 수 있을 만큼 굽은 도로에서도 주행이 뛰어나다고 설명했다. 저상으로 설계돼 있어 교통약자들이 승하차하기 편할 뿐 아니라, 버스 중앙차로 정류장 같은 낮은 플랫폼을 만들면 된다. 이 때문에 초기 건설비가 고가 경전철의 3분의 1, 중전철의 8분의 1 수준이다. 자동차처럼 화석 연료로 움직이면서 매연을 내뿜지 않아 친환경적이다.
■‘도로’에 밀린 트램 도입
이런 무가선 저상트램의 기술은 미래창조과학부도 인정한 ‘원천기술’이다. 2015년 말까지 실용화하겠다는 계획도 수립됐다. 무가선 저상트램은 2012년 8월 여수 엑스포에서 첫선을 보였다. 대전, 경기 수원시, 서울 위례신도시 등이 트램 도입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무가선 저상트램은 그해 11월 언론 시승행사 이후로는 오송 철도기지창을 벗어나지 못했다. 도입을 시도할 때마다 ‘경제성’이 발목을 붙잡은 것이다. 수원시는 수원역~장안구청 5.9㎞ 구간에 트램을 사업비의 60%를 국고로 충당하는 재정 사업으로 시행하려고 했으나 2013년 기획재정부의 예비타당성조사 결과 경제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분석됐다. 철기연 관계자는 “예비타당성 조사 기준은 철도가 아니라 도로교통 중심으로 짜여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트램이 도로 1개 차로를 점유하다 보니 도로가 좁아지게 돼 도로교통 중심의 예타에서는 경제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경전철·중전철보다는 경제성이 있지만, 정작 트램이 달리게 될 도로 위 차량과 비교하니 ‘약점’들이 노출된다. 그중 하나는 제동 성능이 차량보다 떨어진다는 점이다. 전용 철로를 달리는 게 아니라 다른 차량들과 함께 횡단보도나 교차로를 지나야 하다보니 제동이 잦은데, 빠른 속도를 내면 감속에 시간이 걸리므로 제 속도를 낼 수 없다.
대전시에서는 도시철도 2호선을 ‘트램으로 하느냐, 고가 자기부상열차로 하느냐’는 논란도 일었다. 트램이 최대 시속 70㎞는커녕, 현재 도로 상황상 시속 30㎞밖에 낼 수 없다는 분석이 나온 뒤였다. 기존의 시내버스 및 자가용에 비해 대중교통으로서의 장점이 없다는 이유로 그보다 빠른 자기부상열차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섰다. 대전시는 지난해 12월 트램 도입을 결정했지만, 트램 도입을 적극 추진하던 권선택 대전시장마저도 지난 10월 “임기 내 착공은 불가능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서울시내 버스 중앙차로제가 처음 시행됐을 때 도로 교통망이 혼란에 빠졌듯 무가선 트램 도입 시 예상되는 교통 혼란도 도입을 늦춘 계기가 됐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공사비가 적게 들고 관리가 편하다는 장점이 도입을 방해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공사 규모가 커야 수익이 많아지는 지역 토건업체들로서는 공사비가 지하철의 3분의 1 수준인 트램 도입을 달가워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 터키에서 먼저 선봬는 국산 트램
한국 기술진이 개발한 무가선 저상트램이지만 이런 사정으로 한국보다 터키에서 먼저 실용화되게 됐다. 무가선 저상트램을 함께 개발한 현대로템은 지난해 8월 터키 이즈미르에 유가선 저상트램 38편성(5개량 1편성)을 공급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지난 10월에는 터키 안탈리아에 트램 18편성의 수주 계약을 체결한 동시에 내년 상반기에 이즈미르에 투입될 트램의 현지 생산도 시작했다. 2건의 계약으로 벌어들인 금액은 약 1254억원에 이른다.
기술 수출의 좋은 사례가 됐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2015년 도입이 실패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트램 도입 가능성은 어둡지만은 않다. 서울 위례신도시, 성남 판교신도시 등은 여전히 트램 도입에 긍정적이고, 수원시는 재정 사업 대신 민간투자 사업으로 트램을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최대 250명까지 태울 수 있는 대중 교통수단을 환경파괴나 비용부담 없이 도입할 수 있다는 것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궤도가 매립형이고 궤도 1개선 폭이 타이어보다 크지 않아 트램 노선을 중앙 차선 양옆으로 설치하면 시내버스가 함께 다닐 수도 있다. 서울을 비롯한 각 도시들이 경관 문제를 내세워 고가도로를 점차 없애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무가선 저상트램은 선로 부지나 고가 선로를 별도로 설치할 필요가 없어 제격이다.
선로 설치 때문에 도시가 둘로 쪼개지는 것도 막을 수 있다. 도시 재생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는 트램 도입을 계기로 쇠퇴한 공업지대가 보행자 중심의 친환경도시로 되살아나기도 했다. 시기는 늦춰졌지만 장점이 많고 지자체의 도입 의지가 커서 수년 내엔 트램을 국내 도로에서 만나게 될 수도 있다.
트램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도시는 미국 샌프란시스코다. 언덕 위를 느긋하게 달리는 트램은 샌프란시스코의 명물로, 영화에도 자주 등장했다. 2007년 위례 신도시 구상이 처음 나왔을 때도 ‘샌프란시스코의 트램이 도입된다’는 점이 주목을 불러일으켰다. 샌프란시스코뿐 아니라 필라델피아, 댈러스에서는 트램을 운영하는 회사만 3곳이다. 유럽에서는 프랑스, 독일 등 서·북유럽 선진국뿐 아니라 동유럽 국가까지 트램 운행 도시가 많다. 철도강국 일본을 비롯해 중국과 대만 등 아시아는 물론 북한 평양과 청진에서도 트램이 운행 중이다.
세계대중교통협회(UITP)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 388개 도시가 트램을 운영하고 있다. 트램 노선의 길이를 모두 합하면 1만5618㎞에 이른다. 공사 중인 구간은 총 850㎞, 계획된 구간은 2350㎞다. 트램 노선이 가장 긴 도시는 호주 멜버른으로 노선 길이가 245㎞에 달한다. 전 세계의 트램 정류장은 총 3만2345개이며, 구간 간 거리는 평균 484m이다.
전 세계 트램의 연 평균 수송 인원수는 135억명이다. 전 세계 대중교통 이용객의 3% 정도를 트램이 분담하는 셈이다. 연 수송 인원이 가장 많은 도시는 헝가리 부다페스트(3억9600만명)다. 오스트리아 빈,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체코 프라하 등 연 수송 인원이 3억명을 넘는 도시들은 주로 동유럽에 있다. 트램 편성을 가장 많이 하고 있는 도시도 프라하(920개)다. 다음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919개)다. 구간 거리에 비해 이용객 수가 많은 곳은 홍콩, 터키 이스탄불, 일본 도쿄 등 아시아 국가 도시였다.
트램은 최근 가장 많이 도입된 대중교통 수단이기도 하다. 도명식 한밭대 교수에 따르면 2000년 이후 새로운 교통수단을 도입한 세계 289개 도시 중 80%에 육박하는 도시가 트램을 설치했다. 유럽의 경우 169개 도시 중 92%인 155개가, 미주는 48개 도시 중 40개(83%)가 트램을 도입했다. 아프리카는 2000년 이후 대중교통을 도입한 6개 도시에서 트램이 운행되고 있다. 비약적으로 늘어난 자동차에 주요 대중교통의 자리를 내줬지만, 환경에 대한 주목도가 높아지면서 트램이 다시 주요 대중교통 수단으로 각광받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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