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운드업에 굳이 + 를 붙여봤습니다. 사실은 저도 상황들을 돌아보면서 많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배우는 마음으로, 국제뉴스를 처음 접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사족을 '+' 해 봅니다. 수정할 사항은 '가감없이 따뜻하게(?)' 지적 부탁드립니다.
- '국민의 헌법'
1997년, 태국에는 "국민의 헌법"으로 불리는 헌법이 발의된다. '헌법 초안 위원회'의 작품이다. 500석의 하원, 200석의 상원으로 구성된 양원제 국회가 구성된다. 태국 역사상 처음으로 양원이 모두 직접선거로 구성되게 됐다.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조항들이 생겨나며 헌법에는 '인권'이 우선순위로 떠올랐다. 선거로 선출된 정부가 안정적으로 자리잡을 수 있는 조치들도 생겼다.
한 달 가까이 주요 정부청사 주변을 점거하고 있는 태국 방콕의 반정부 시위대가 2월18일 시위장을 강제 철거하려는 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고 있다. 이날 충돌 과정에서 반정부 시위대와 경찰이 서로 실탄을 쏴 3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다쳤다. 방콕/AP연합뉴스
- 탁신의 집권
2001년, "국민의 헌법" 아래 첫 선거가 치러졌다. 태국 역사상 가장 열려있고, 부패와 거리가 먼 선거로 꼽혔다. 탁신 친나왓이 이끄는 타이락타이당이 선거에서 이겼다. 뿐만 아니라 탁신 정부는, 태국 역사상 최초로, 4년 임기를 완전히 채운 정부로 남았다. 2005년에는 태국 역사상 최고의 투표율을 기록한 끝에, 타이락타이당이 다시 절대 다수를 차지했다. 그러나 투표 현장에서의 매수·폭력 등은 2005년에도 여전해 과제로 남았다. 태국의 선거감시단체인 폴워치(PollWatch)재단은 2001년보다 그 정도가 더 심각했다고 밝혔다.
기업가 출신의 부패 정치인으로 (개인적으로) 기억되는 탁신은, 사실 태국 북부의 서민들에게 복지정책을 내걸어 지지를 받았다. 1인당 30바트만 내면 의료보험에 가입할 수 있게 됐고, 농가엔 부채탕감을, 마을에는 발전지원금을 줬다. 기업가 출신 '거부'인데도 여전히 지지 기반이 중산층이 아닌 것은 이 때문이다. (기업가 출신 지도자를 모신 사람의 입장에서는 헷갈릴 수 있는 일. 개인적으로, 탁신하면 떠올랐던 것은 부패로 '도망간' EPL 맨체스터시티 前 구단주였다는 것;)
- 2006년 '18번째' 쿠데타
2006년 9월19일, 군부가 탁신의 정부를 전복시키려 한 쿠데타가 벌어졌다. 군부는 헌법을 무시하고 의회와 헌법재판소를 해산시켰다. 몇몇 정부 인사들을 구금한 뒤 파면시켰고, 계엄령을 선포했다.
푸미폰 국왕이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평에 '왕실쿠데타'라고도 불린다. 이 쿠데타를 지원한
민간단체는 민주주의인민연합(PAD)다. 2006년 2월8일 설립된 중산층 계급 기반 세력이다. 왕실에 경의를 포한다는 의미로 옐로셔츠를 입은채 반탁신시위에 나섰다. 이 때 탁신은 의회를 해산하고 재총선을 치르려고 했지만, PAD와 민주당은 보이콧을 선언했었다. 4월 탁신은 승리했지만 쿠데타를 피하지 못했다.
* 태국에서의 쿠데타는 굉장히 자주 일어났던 일. '쿠데타 - 헌법 개정 - 선거 - 쿠데타'의 순환이 태국에선 자주 일어났다. 쿠데타 당시 태국 군부의 탱크에 노란 리본(?)이 내걸린채 도시를 활보하던 모습은 카메라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당시엔 몰랐는데, 화면에 같이 잡힌 시민들의 모습이 지금 떠올려보니 '늘상 있는 일'이라는 듯 평온했던 것 같다.
군부는 수라윳 출라농 Surayud Chulanont 장군을 국무총리로 지명했다. 임시 헌법을 만든 뒤 곧 새로운 영구헌법 제정 위원회를 꾸렸다. 250석의 의회를 구성했는데, 이 중 군인들 의석을 만들면서 가난한 다수를 대표할 자리는 없다는 비판이 나왔다.
임시 헌법에는 국무총리를 언제든지 없앨 수 있다는 내용도 있었다. 의회가 내각의 결정에 반대할 수도, 대중이 법안에 대한 논평을 낼 수도 없었다. 2007년 8월 24일 영구 헌법이 임시 헌법을 대체했다.
그해 1월엔 계엄령이 일부 해제됐지만, 7월엔 정치 활동이 금지됐다. 5월 30일엔 탁신의 타이락타이 당이 해산됐다. 새 헌법은 8월19일 국민투표를 통해 승인받았고, 12월엔 민주주의 총선이 다시 열렸다. 탁신의 타이락타이당은 5년간 선거 참여가 배제됐지만, 제1당 자리에 오른 건 친탁신 정당 '국민의힘(People's Power)'이었다.
- 탁신 축출 이후의 정치 위기
2008년 1월 총리로 선임된 사막 순다라벳이 이끄는 친탁신 '국민의힘(People's Power)'당이 다른 소규모 5개당과 연정을 꾸렸다. 사막이 여러 스캔들에 휘말리고 불신임 투표에서도 살아남자 9월 들어 시위대들이 정부건물과 공항을 점거하기도 했다. 태국 헌재가 사막의 유죄 혐의를 인정해 물러났다.그가 당시 총리직과 겸해 요리쇼를 진행한 사실이 위헌이라는 판결이 나왔기 때문이다.
2008년 2월, 17개월간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탁신이 돌아왔다. (그러나 그해 8월 탁신은 다시 출국했고, 10월 태국 대법원이 부패혐의에 유죄를 선고해 탁신은 망명을 선언했다.)
같은 당의 솜차이 옹사왓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지만, 10월 솜차이는 민주주의 인민연합(PAD) 시위대들이 점거한 집무실에 들어가지 못했다. 2008년 12월2일, 태국 헌재는 국민의힘당의 선거 부정이 위헌임을 밝혔다. 결국 국민의힘당도 해체를 맞았다.
* 이후 사법부 관계자와 왕실 Privy Council Office(국왕 정치 자문단) 직원과의 전화 내용이 인터넷에 공개돼 논란이 일었다. 이 전화내용에는 국민의힘 해산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언론이 이 내용을 다룰 당시에는 통화내용이 조작이라는 이야기도 있었으나, 2010년 6월 해산된 국민의힘당 지지자들이 녹음된 전화 때문에 정당이 해산된 것이라며 문제를 제기했다.
이 때부터 연정을 맺던 정당들에서 야당으로의 움직임이 시작됐다. 민주당은 2001년이래 처음으로 제 1당이 될 수 있었다. 2008년 12월15일, 아피싯 웨차치와가 새로운 총리로 지명됐다.
2009년 4월,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주의 국민연합 전선(이른바 '레드셔츠', 친탁신)이 제4회 동아시아정상회의 취소를 요구했다. 페타야에 있는 로열클리프호텔에 돌진해 창문을 부수고 원자바오 당시 중국 총리의 행사장 진입을 막기도 했다.
1년 뒤, 아피싯 정부와 군부가 레드셔츠 시위대에 발포해 사망자 87명, 부상자 1378명을 냈다는 발표가 나왔다. 2010년 4월에는 육군이 시위 해산에 나섰을 때 자동 발포, 수류탄, '수박'이라 불린 폭탄 등과 맞서기도 했다. 육군도 고무탄 발사 등으로 응대했다. 레드셔츠의 반정부 시위 동안, 정부 건물에 대한 폭탄 공격이 벌어졌다.
레드셔츠에 대항하는 친정부 '옐로셔츠'(현재 반탁신) 시위대도 등장했다. (옐로셔츠는 원래 국왕 탄신일 때 국민들이 '국왕에 대한 존경'을 담아 입고 다녔다. 레드셔츠가 옐로셔츠에 반하는 개념으로 생긴 것) 옐로셔츠 시위대가 총격에 사망하는 일이 생기자, 정부는 이를 레드셔츠의 소행으로 돌렸다. 레드셔츠가 방콕의 업무지구를 점거해 몇주간 지역이 '셧다운'됐다.이 때 아피싯 정부는 (당시 반정부)레드셔츠 시위대를 유혈 진압했다.
2011년 7월3일, 잉락 친나왓이 이끄는 퓨어타이당이 총선에서 승리했다. 정치 경력이 없던 잉락이 이끄는 푸어타이당이 내세운 구호는 "탁신이 생각하면 푸어타이가 행동한다"였다. 잉락은 역사상 최초 여성 총리가 됐다. 사실상 푸어타이당은 타이락타이당의 후신인 셈이었다.
- 한동안 조용하더니… 최근 정치 위기
2013년 후반기 시위가 다시 일었다.
11월4일, 태국 언론들은 정치사범 사면법을 여당인 푸어타이당이 통과시키려 하자 국민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 법에 따르면 탁신에게는 '면죄부'가 주어진다. 친정부 '레드셔츠'도 이 법안에 반대했다. 레드셔츠 시위대를 유혈진압한 군·경찰간부까지 이 법안으로 사면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2013년말 태국 대규모 시위를 촉발시킨 표면적 사건은 사면법안 통과였다. 쌀 수매정책과 만연한 정부 고위층 비리야 말할 것도 없고) [관련기사]
전 야당 지도자 수텝 터억수반이 '탁신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를 주도했다. 경찰추산 9만8500명, 방콕포스트가 사진을 통해 추산하기로는 40만명이 시위에 나섰다. 탁신이 저지른 정치 범죄와 여러 혐의들 때문이었다. (정부의 쌀 수매정책도 한 몫. 농민들의 쌀을 정부가 사서 팔아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생각보다 심각한 재정 적자가 발생했다고) 국민민주개혁위원회(PDRC)라는 새 조직이 결성돼 시위를 주도했다. 시위 참여자들이 늘어나면서 시위 분위기는 점차 고조됐다. 잉락 정부에는 기존 국회를 대신할 '의회'인 새로운 '국민 위원회' 설립을 요구했다. '탁신 정권'을 뿌리뽑기 위함이었다.
결국 잉락은 2013년 12월9일 의회를 해산했다. 2014년 2월2일을 조기 총선날짜로 선포했다. PDRC는 24시간 내 총리 사임을 요구했다. 이날 시위대 16만명이 정부청사 건물에 들어왔다. 잉락은 2014년 2월까지 그의 의무를 다하리라 천명했다.[관련기사]
2014년 1월, 수텝이 이끄는 시위대가 방콕 시내를 점거하는 '셧다운' 시위를 벌였다. 친정부
·반정부 시위대가 충돌해 20여명이 숨졌다. 결국 22일 태국 정부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관련기사]
2월2일 예정대로 조기 총선은 진행됐지만, 반정부 시위대(옐로셔츠)는 후보 등록과 선거 진행을 막았다. 수텝과 PDRC가 주도한 시위에는 350만명이 몰렸다. (정부군은 27만명이라 주장했다) [관련기사]
2월18일 경찰이 반정부 시위대가 점거한 시위장을 강제 철거하려다 경찰관 1명, 시위대 2명 등 총 3명이 사망하고 52명이 다쳤다. 시위대가 점거한 청사의 업무 공백을 방치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이날 오전 시위대와의 협상이 시작됐지만, 이 과정에서 무력 충돌이 벌어진 것이다. [관련기사]
정부는 미완성으로 끝난 총선에 보궐선거를 벌이가로 예정했으나, 태국 헌재는 3월21일 '전국에 동시에 벌어지지 않은 총선'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관련기사] 아직까지도 이따금씩 친정부·반정부 시위는 계속되고 있다.
"탁신과 같은 신자유주의자가 왕과 군부독재정권이 엄두도 내지 않던 일련의 민중적 정책을 폈던 이유는 표를 끌어모으기 위한 정치적 목적이 앞섰겠지만 그보다는 태국 사회가 천천히라도 앞을 향해 걸어온 결과이다. 태국의 노동자, 농민, 빈민은 지난 60년 동안 왕실과 탱크의 공포가 드리운 그늘에서 조금씩 벗어나 왔다. 탁신이 그들의 목소리를 일부라도 수용한 것은 이제 더 이상 탱크와 왕관으로 짓누를 수 없는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근대적 군주제의 그늘에서 태국이 벗어난다고 해도 진보적 지식인의 부재는 민중의 현실과 미래를 탁신과 같은 신자유주의 자본가의 손에 헌납하는 꼴이 되고 있다"
유재현, <아시아의 오늘을 걷다> (그린비) 중 발췌
'에라 모르겠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라운드업+] 아프가니스탄 전쟁 약사 (0) | 2014.07.17 |
---|---|
'파키스탄 탈레반 소탕작전'의 무대, 북와지리스탄의 눈물 (0) | 2014.07.16 |
[라운드업] 태국 '사면법 시위'에서 군사쿠데타까지 (0) | 2014.05.23 |
[라운드업+] 조코위와 인도네시아 정치 (0) | 2014.04.13 |
[라운드업+] 2013 방글라데시 사바르 라나플라자 참사 (0) | 2014.04.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