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1) ‘세계인의 마을’ 오로빌을 가다
▲ 공존
태양광·정화시설 등 통해 자연과 함께 더불어 생활
서로 존중하며 마을 운영
▲ 공유
벽돌·하수처리 시설 등 저개발국가에 기술 나눔
▲ 과제
주택 부족·수익 배분… 외부충격 대비 등 고민
성장과 빈곤, 다문화와 민족주의, 첨단 정보기술(IT) 산업과 낙후된 농촌. 인도는 세상의 모든 이슈들이 공존하는 실험대다. 인구 12억명, 현재는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나라이지만 이번 세기 중반이 되면 인도의 인구가 중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가 될 것이라는 데에 전문가들이나 연구기관들의 예측이 일치한다. 그 많은 인구가 급속한 도시화를 겪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인도 최대 도시인 뭄바이 광역시는 주민이 1200만명에 이르며, 그중 절반 이상이 빈민으로 추산된다. 비슷한 인구를 가진 수도 델리도 사정은 비슷하다. 하지만 하이데라바드나 벵갈루루처럼 IT기술의 메카로 부상한 지 10여년이 지난 곳들도 있다.
첸나이는 남부 타밀나두 주(州)의 주도로, 470만명가량이 살고 있는 대도시다. 영국 식민지 시절 마드라스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이 도시는 벵갈만에 면한 항구도시로, 남인도 지역의 중심이자 거대한 무역항이다. 지난달 10일 첸나이 공항에 내리자 인도의 여느 대도시가 그렇듯 매연 가득한 탁한 공기가 외국에서 온 방문객을 맞았다. 하지만 취재팀의 목적지는 첸나이가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는 소도시 오로빌(Auroville)이다. 인도가 자랑하는 신흥 대도시들 대신에 마을 수준의 이 작은 도시를 찾은 것은, 공존과 공동체 정신, 탈성장과 친환경 등의 실험을 반세기 가까이 직접 실현해오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 힌두 명절에 크리스마스 트리
첸나이에서 해안 도시 폰디체리로 이어지는 동부해안도로(ECR)를 타고 한참을 달렸다. 폰디체리를 지나 12㎞ 정도 가자 나무가 많은 숲속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푸른 숲에 가려져 안쪽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오토바이와 자전거를 타고 오가는 여러 피부색의 사람들을 보니 ‘이곳이 오로빌이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덜컹거리는 낡은 택시를 빌려 타고 3시간 가까이 달려 도착한 오로빌은 타밀나두주 빌루푸람 지역에 있는 주민 2300여명의 아주 특별한 도시다. 인도의 다른 소도시들이나 마을들과 달리 이곳은 유네스코의 지원과 국제적인 관심 속에 1968년 ‘계획도시’로 지어졌다. 오로빌을 설립한 것은 인도의 명상가이자 철학자인 스리 오로빈도를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마더(어머니)’라 불리는 미라 알파사라는 여성이 주도해 건설됐고, 유네스코의 자금 지원 아래 프랑스 디자이너 로제 안제르가 도시의 중심부를 설계했다.
지난달 13일 오로빌 타운홀 주변의 한 작은 학교. 유치원생에서 초등학생 또래 아이들이 함께 수업을 듣는 곳이다. 인도의 1월 최대 명절 퐁갈을 앞두고 아이들 대여섯이 강당 옆에서 키만한 트리를 세우고 있었다. 까무잡잡한 아이, 하얀 아이가 함께였다. “크리스마스에 설치하려던 것인데, 늦게 배달됐어요.” 한 교사가 말했다. 아이들도, 교사들도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내일 빛의 축제라는 주제로 아이들과 수업하려고 해요. 퐁갈도 크리스마스도 모두 밤에 반짝이는 전구를 켜는 축제거든요.”
‘마더’가 목표로 삼은 것은 ‘세계의 도시’였다. 특정 민족이나 종교, 인종 등에 상관없이 이곳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세계인의 마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과 소비지상주의, 경쟁과 환경파괴로부터도 물론 자유로워야 한다. 설립 이후 40여년이 넘게 오로빌은 그런 가치를 지키며 유지돼왔다.
오로빌의 중심부에는 명상과 성찰을 위한 공간이자 도시의 핵심인 ‘마트리만디르’라는 구(球) 모양의 건물이 있다. 마트리만디르가 인도의 흔한 종교 시설이나 힌두교 건물과 다른 점은, 전체가 태양광 발전으로 운영된다는 점이다. 마트리만디르의 주변은 잘 가꿔진 정원과 녹지가 있다. 이곳을 중심으로 방사상으로 도로가 뻗어 있고 그 길들을 따라 네 개의 구역으로 도시가 나뉘어 있다. 주거지역, 산업지역, 문화·교육지역, 그리고 국제지역이다. 도시 주변에는 그린벨트를 두른 듯 녹지와 농장, 정원, 씨앗은행, 약초·허브 재배장 등이 배치돼 있다.
■ 행정은 있지만 ‘군림’하지 않는다
인도인이 아닌 외국인이 오로빌에 가려면 하루 혹은 일주일간의 방문을 웹사이트(www.auroville.org)에서 신청할 수 있다. 오로빌에서 자원봉사를 하거나 일을 하면서 거주하려면 인도 체류 비자와 함께 ‘오로빌 엔트리 비자’를 별도로 인도대사관에서 받아야 한다. 오로빌 타운홀의 주민서비스센터에 자원봉사자로 등록하고 입주희망 서류를 내면 주 정부 지역주민등록국을 거쳐 거주 허가가 나온다. 이곳에는 한국인도 30여명 거주하고 있다.
전날 오로빌 중심부 타운홀의 회의실에는 50여명 되는 주민들이 모였다. 이날은 3월 열릴 ‘리트릿’이라는 오로빌 전체 회의를 준비하는 첫 모임이다. ‘리트릿’에서는 오로빌의 과거 활동을 조명하고 나아갈 방향을 논의한다. 정부가 새로 구성되듯 리트릿을 거쳐 오로빌에 새 판이 짜일 수도 있다. 이날 모인 ‘리트릿 준비 회의’에 함께한 이들은 모두 자원자들이다. 역시 참석자들의 피부색은 제각각이었다. 리트릿의 주제는 무엇인지, 문서로 된 참고자료들은 없는지 묻는 이들도 있었고 “오로빌을 넘어 인도와 전 세계에 도움이 돼야 한다”는 얘기도 나왔다. 이곳에는 49개국에서 온 사람들이 산다. 여기 사람들에게는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가 몸에 배어 있다.
물론 이곳에도 행정기구는 있다. ‘오로빌 재단’이 일종의 자치정부다. 재단은 인적자원개발부 관할이지만 인도 의회가 제정한 특별법에 따라 독립성이 보장된다. 오로빌 행정실무는 경제활동을 관리하는 기구, 홍보와 관광을 책임지는 기구, 복지 담당 기구 등이 맡고 있는데 이들은 ‘워킹그룹’이라 불린다. 워킹그룹들은 각자 주어진 기능과 역할을 수행할 뿐, 수직적으로 군림하지 않는다는 것이 주민들의 설명이다. 주민들은 회의를 통해 내부 조직을 바꿀 수 있다.
‘워킹커미티(실무위원회)’가 여러 워킹그룹의 역할을 조율하고 관리·감독하지만 워킹그룹들의 활동을 지시할 권한은 없다. 각 그룹은 담당 분야에 대한 결정권이 있다. 이 기구들의 역할을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비정기적으로 결정되는 주민의 의견이다. 워킹커미티에서 일하는 프랑스인 에릭(39)은 “행정 업무에 대한 비판과 패러디 공연을 오로빌에서는 쉽게 볼 수 있다. 무엇이든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 이곳 분위기다”라고 말했다.
현안이 있으면 주민들은 자체적으로 의견을 모은다. 주민이 집과 관공서, 숙박업소 등에 매주 배달되는 소식지 ‘뉴스 앤드 노츠’를 통해 회의를 제안하면, 참여하고 싶은 주민들이 동참한다. 리트릿 준비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도 소식지를 보고 스스로 회의장을 찾은 것이다. 회의 결과는 다시 소식지에 공개되고, 다른 주민들이 다음 회의에 모여 의견을 전한다.
■ 솔라 키친과 적정 기술
워킹그룹 사무실들에서는 설립 당시와 지금을 비교한 사진들을 볼 수 있다. 황무지였던 이곳은 지금 나무들이 울창한 녹색 마을로 바뀌었다. 오로빌 안에서는 어디로 향하든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흙길을 지나게 돼 있다. 또 이곳의 가게들에서는 화학성분으로 된 샴푸와 세제를 팔지 않는다. 기념품 상점과 옷가게에서 파는 의류도 천연섬유로 만든 것들이다.
주민들이 점심시간에 가장 많이 찾는 식당은 ‘솔라 키친’이다. 이 식당 지붕 위에는 지름 15m의 반구가 달려 있다. 거울 조각들이 빼곡히 박혀있는 이 반구로 햇빛을 모아 물을 끓이고, 거기서 나온 수증기로 음식을 조리한다. 오로빌에서는 곳곳에서 친환경 기술을 접할 수 있다. 하수의 부유물을 침전시키고 산소를 투입, 농업·공업용수로 쓸 수 있도록 정수하는 장치도 있다.
오로빌이 인도 정부와 공동으로 세운 지구연구소는 기존 벽돌의 3분의 1도 안되는 에너지로 벽돌을 만드는 장치와 기술을 갖고 있다. 벽돌을 화덕에 굽지 않고 건조시켜 만들기 때문에 제작과정에서의 탄소 배출도 최소화된다. 이 벽돌 기계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콩고민주공화국, 네팔 등 35개국에 보냈다. 오로빌은 자체적으로 개발한 적정 기술(저개발 지역 주민들을 위한 기술)에 대해 지적재산권을 주장하지 않는다. 이윤보다 사람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에서 온 키릿(64)은 오로빌에 정착한 이듬해인 1997년 외곽의 둑과 저수지를 직접 만들었다. 매년 11월 우기가 되면 빗물에 토사가 흘러내린다. 키릿이 제방을 만들기 전까지 오로빌 주민들의 별명은 ‘붉은 발’이었다. 우기에 녹아내린 붉은 흙이 늘 발에 묻어 있기 때문이었다. 우기가 끝나면 물이 모자라 농사에 어려움이 많았다. 키릿은 네덜란드에서 모금을 하고 인도 정부의 후원을 받아 제방과 저수지를 만들었다. 지난해까지 그의 주도로 만들어진 둑과 저수지가 100개 가까이 된다. 키릿은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하지 않았을 일”이라고 말했다. 오로빌이 반세기 동안 유지돼온 비결을 묻자 많은 주민들은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고정된 체계는 없지만 오랜 기간 다양한 사람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최선의 해결책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 집 부족·수익 배분은 고민거리
다양한 실험이 가능하다는 것은 통제가 없고 자유롭다는 얘기다. 비용을 충당할 수만 있다면, 자유롭게 무엇이든 실험할 수 있다. 솔라 키친이나 하수 정화시설, 벽돌 기계는 모두 이런 실험을 거쳐 탄생했다. 도전을 통해 얻어낸 결과물들은 곧 오로빌의 자산이 됐다. 다양한 친환경 기술들이 개발되며, 환경운동이나 적정 기술 연구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오로빌을 찾게 됐다. 교육 때문에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다.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다양한 문화·인종의 친구들과 어울리며 배운다. ‘배움이 멈추지 않는 곳이 돼야 한다’는 오로빌 헌장에 따라 교육비는 무료다. 한국인 주민 유영애씨(51)는 “서울에서 대안학교를 보내려면 아이들과 떨어져 지내야 하지만, 오로빌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대학입시를 위한 교육 과정도 오로빌 안에 생겼다.
물론 난제도 적지 않다. 주민이 늘다 보니 집이 모자란 게 최대 현안이다. 돈 없는 젊은이들도 살 수 있도록 소형 1인 주택들을 짓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그래서 행정당국은 거주 희망자들이 스스로 살 집을 마련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오로빌의 수입원인 ‘커머셜 유닛’도 새로운 고민거리를 던져줬다. 오로빌에는 의류, 문구류, 악기류 등 여러 가지 상품을 제작해 판매하는 커머셜 유닛들이 있다. 그중에는 인도나 세계 시장까지 진출한 곳도 있다. 기업마다 벌어들이는 수익이 다른데, 재단에 모두 똑같이 수익의 33% 이상을 기부금으로 낸다. 그러다 보니 수익이 많은 업체에 기부금을 더 내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 마을 운영자금의 상당 부분은 외부의 지원금이다. 오로빌의 경제 기구인 파이낸스센터 최고 책임자인 미국인 라일(57)은 “아직 외부에서 올 경제적 충격에 대비할 장기적인 비전은 없다”며 “내부적으로 새로운 법적 조치나 규제를 만들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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